8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 고궁이 보이는 안국 아지트에서 시즌 8의 마지막 모임을 열었습니다. 시즌을 시작한 5월에는 ‘가장 기대되는 책’을 골랐는데요. 마지막 모임에서는 같은 네 권을 두고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다시 꼽아 봤습니다.
시작할 때 2명이 골랐던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를 마지막 모임에서는 7명이 꼽았습니다. 시작할 때 7명이 골랐던 『통섭의 식탁』은 2명이 되었고요. 넉 달 사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지막에 읽는 책이 가장 선명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아니면 30년 전에 쓰인 책에 담긴 이야기, 인터넷 등장 앞에 인텔 경영자가 겪은 고뇌의 과정이 AI를 곁에 둔 이 시기에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까요?
다섯 갈래로 마지막 모임을 돌아봅니다.
- (1) 가장 기대되는 책, 가장 기억에 남는 책
- (2) 안 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것
- (3) AI 에이전트에도 전략적 변곡점이 있었다
- (4) 그냥 해줘! 자아의탁형 사용자, 그리고
- (5)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시대.
모임에서 함께 나눈 지적 대화의 쿠키들
발제문에 형광펜을 그어 둔 문장들
이번 책에서 메모해 둔 문장 몇 가지를 모았습니다. 국내판 서문은 시즌 7에서 함께 읽은 『실패를 통과하는 일』의 박소령 대표가 썼는데요.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 “당신이 어디에 사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p.33) – 1996년, 30년 전의 문장입니다.
- “전략적 변곡점에서 ‘점’이라는 말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점이 아니라 길고도 고통스러운 투쟁 과정이다.” (p.150) – 점이 아니라 과정. 국내판 서문에도 인용된 문장입니다.
- “봄이 오면 눈도 가장자리부터 녹는다.” (p.170) – 변화는 중심보다 가장자리에서 먼저 보인다는 이야기.
- “사실 이것은 우리가 고무시킨 태도의 변화였지만 우리는 그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p.113) – 1994년 펜티엄 사건. 회사는 제품의 기술 문제를 보고 있었는데, 고객은 이미 인텔이라는 회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 “슬픈 이야기지만 아무도 당신의 커리어를 보장하지 않는다. 당신의 커리어는 말 그대로 ‘당신의 비즈니스’다.” (p.35) – 기업의 변화만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 “해결은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과거의 관습에서 탈피해야 새로운 통찰이 생긴다.” (p.188) – 결국 직접 해보라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1. 가장 기대되는 책,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시작할 때 골랐던 ‘가장 기대되는 책’과 마지막 모임에서 고른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 손현, 『경험을 기획하는 일』 – 시작할 때 2명, 마칠 때 2명
- 데이비드 엡스타인,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 시작할 때 5명, 마칠 때 3명
- 최재천, 『통섭의 식탁』 – 시작할 때 7명, 마칠 때 2명
- 앤드루 S. 그로브,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 시작할 때 2명, 마칠 때 7명
마지막 모임에는 창준 님과 지연 님이 다른 일정으로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2. 안 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것
8번째 시즌 마지막 모임을 마치고 제가 가져온 문장은 “안 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었습니다.
- 안 될 텐데 뭐하러 애써.
- 어차피 다 사라지는 것들이야.
-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쓰는 게 똑똑한 거 아니야?
안 될 걸 알면서도 애쓰는 사람, 선착순 3명에 들지 못해도 끝까지 전력질주하는 4번째 사람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는 뭐가 될지 미리 알 수 없고, 항상 되는 일만 골라서 할 수도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더 나은 선택’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덜 힘든 쪽을 택했던 때도 많았습니다. 저도 힘든 선택 앞에서는 꽤 쉽게 제게 유리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고 자기합리화 엔진을 돌리면서 마음을 달래곤 하지요.
그래서 저는 끝까지 해보는 사람에게 남는 게 있다고 믿습니다. 직접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그 과정까지 다시 들여다본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 것이 생깁니다.
다만 끝까지 해본다는 게 같은 방식을 오래 붙든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상황이 달라졌다면 방법도 바꿔야 합니다.
3. AI 에이전트에도 전략적 변곡점이 있었다
봄에 첫 모임을 열던 날 우리는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들을 한참 이야기했지요. 그래서 “기술이 그 해자의 폭을 나날이 좁히고 있다“(p.33)는 문장을 읽다가 출간 연도를 다시 봤습니다. 1996년입니다. 30년 전이지요.
저는 AI를 쓰는 방식도 어느 순간부터 꽤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GPT에 사진을 넣고 지브리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게 됐을 때였습니다. 함께 일하는 임원께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을 GPT에 넣어 여러 모습으로 바꾸고, 그걸 다시 영상으로 만드는 모습을 봤습니다. 얼마 뒤에는 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지브리 스타일로 바꿔 보내주셨고요.
이전에는 이런 작업을 하려면 각각 다른 도구를 써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여러 서비스를 커넥터로 연결하고 MCP를 통해 함께 쓸 수 있게 되면서, AI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습니다.
4. 그냥 해줘! 자아의탁형 사용자
처음부터 AI와 함께 공부하고 일한 사람에게는 GPT가 ‘Second Brain‘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기 생각이 충분히 자리 잡기 전에, 묻는 말마다 맞든 틀리든 그럴듯한 답을 내놓는 AI를 먼저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내 생각을 정리하는 일도 채팅창에 맡기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궁금해해야 하는지까지 AI에게 묻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AI를 곁에 두고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세 번째 책으로 읽은 최재천 교수님의 『통섭의 식탁』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았습니다. ‘기획 독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만 읽는 게 아니라, 먼저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정하고 그 질문을 따라 필요한 책을 읽는 방식입니다. 익숙한 분야와 익숙한 방식만 붙들지 않고, 필요하면 다른 분야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읽은 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 뭘 더 알고 싶은지는 결국 내가 답해야 하니까요.
AI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빠르게 만드는 건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보고, 고치고, 내 기준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일은 여전히 사람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제문 마지막엔 이런 질문을 적었습니다.
AI가 할 수 있더라도, 내가 계속 직접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5.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시대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AI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커뮤니티는 결국 사람이 직접 와야 만들어지는 경험이 많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이 되기도 하고요.
요즘은 직접 하지 않고도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얻기 쉬워졌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내용을 정리해 주는 콘텐츠가 있고, 영화나 전시도 누군가의 요약과 리뷰를 통해 빠르게 훑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독서모임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굳이 책을 직접 읽고, 시간을 내서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요.
저는 그 이유 중 하나가 ‘수고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마음을 넘어서 직접 책을 읽고, 모임에 오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요약 콘텐츠로 여러 권을 빠르게 훑는 대신 한 권을 오래 붙들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부딪쳐 보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렇게 수고한 만큼 반드시 좋은 경험을 얻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커뮤니티를 만드는 쪽이 계속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쉽게 끝낼 수 있는데 한 번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직접 해보는 것.
파도 너머의 더 높은 파도
” 데이터는 과거에 관한 것이고 전략적 변곡점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 (p.179)
앤드루 S. 그로브,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데이터를 많이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데이터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실시간 데이터라고 해도 화면에 뜨는 순간에는 이미 과거가 됩니다.
문제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면서 그다음 변화를 함께 보는 일입니다. 지금 닥친 문제만 해결하기에도 벅찬데, 고개를 들어 다음 변화를 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하던 방식만 반복해서는 다음을 준비할 수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에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 8을 통해 한 달에 한 번씩 ‘무해한 동물의 숲’ 같은 지적 모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게 큰 위로였습니다.
함께해 주신 시즌 8 모든 멤버들께, 그리고 시즌 내내 자리를 지켜 준 파트너 조민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2023년 고민 끝에 시작한 이 작은 커뮤니티가 3년 뒤 제게 이렇게 잔잔하지만 단단한 시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모임 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들을 두고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구원한다’라고 적었는데요. 시즌을 마치며 그 문장의 주어를 바꿔 봅니다.
안 해본 것을 해보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계속 연결되기 위해 조금 더 움직여보려고 합니다.
과거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구원하길!
요즘, 안 될 걸 알면서도 끝까지 달려보는 일이 있나요?
다음 시즌,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 9 모집 시작

우린 정말 사용자를 위하고 있을까? “사용자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에 대하여“를 주제로 아홉 번째 시즌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도 AI와 함께 일하면서 생기는 고민, 그리고 한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일하는 사람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네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 홍진기, 『사고외주』 – 9/18(금)
- 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 10/30(금)
- 김가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 – 11/20(금)
- 김신지, 『제철 행복』 – 12/18(금)
책과 함께 나눈 콘텐츠
알아두면 쓸모있는 것들
모임에서 오간 개념을, 처음 듣는 분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짧게 풀었습니다. 더 알고 싶을 때를 위해 각 용어에 자료를 연결해 두었어요. 굵게 표시된 용어를 누르면 새 창에서 열립니다.
-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 산업의 근본 규칙이 바뀌어 기존의 성공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되는 지점. 인텔을 메모리 회사에서 프로세서 회사로 바꾼 앤드루 그로브가 이 책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이다. 이름은 ‘점’이지만 저자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쓴다.
- Second Brain(세컨드 브레인): 머릿속에 다 담을 수 없는 지식을 머리 밖에 저장·정리해 두는 개인 지식관리 방법. 티아고 포르테가 『Building a Second Brain』(2022)으로 널리 알렸다. 원래는 기억을 보조하는 노트 시스템을 가리켰지만, AI 시대에는 챗봇과 에이전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기억을 넘어 생각까지 맡기는 방식으로 쓰임이 넓어졌다. First Brain이 단단해야 Second Brain이 도구로 남는다.
- MCP(Model Context Protocol): AI 모델을 외부 서비스·데이터와 연결하는 개방형 표준. 앤트로픽이 2024년 11월 공개했으며, 서비스마다 따로 만들던 연동을 하나의 규약으로 통일해 ‘AI의 USB-C’라고도 불린다. 본문에서 이야기한 커넥터들이 이 규약 위에서 움직인다.
- 자아의탁형 사용자: 무엇이 궁금한지, 무엇을 좋아하는지까지 AI에게 물어보며 판단의 주어를 채팅창에 맡기는 사용 방식을 가리켜 이 글에서 붙인 이름. 도구에 답을 묻는 것과 나를 묻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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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바리 시즌7, 네 번째 모임을 마치고 – 책을 들고 집에 가는 길이 내내 행복했으므로 – 한 시즌을 마무리하던 지난봄의 기록.
출처
-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 앤드루 S. 그로브, 유정식 옮김, 부키(2021). 원제 Only the Paranoid Survive(1996). 페이지 표기는 부키판 기준이며 발제문에서 직접 대조했다.
- 통섭의 식탁 – 최재천, 명진출판(2012) / 움직이는서재 재출간(2015). ‘기획 독서’의 출처.
- Second Brain – Tiago Forte, Building a Second Brain, Simon & Schuster(2022). 개요는 fortelabs.com 참고.
- MCP – Anthropic, ‘Introducing the Model Context Protocol'(2024.11), anthropic.com.
- 신규 시즌 안내 – 트레바리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 9 모집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