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하나원큐 앱 아이콘이 회색이 됐습니다. 이름 앞에 ‘(구)’가 붙었습니다. 알림톡이 왔습니다. “NEW 하나원큐 출시에 따라, 기존 하나원큐 앱 아이콘이 회색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업데이트 버튼은 없었습니다. 사용자가 해야 할 일은 3가지였습니다.
- 기존 앱을 삭제한다
- 새 앱을 마켓에서 설치한다
- 비밀번호와 인증서를 다시 발급한다
은행 앱은 업데이트가 원칙입니다. 자동으로 새 버전이 설치되고, 로그인 정보는 그대로 유지되고, 이체 한도나 자주 쓰는 계좌 같은 설정은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원큐는 그 원칙을 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 앱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은행은 2025년 3월부터 ‘프로젝트 FIRST’라는 차세대 전산시스템 구축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코어뱅킹부터 모바일 앱까지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수준의 작업이었습니다.
기존 앱을 고치는 게 아니라 새로 짓는 수준의 개발입니다. 인증서, 지문 인증, 암호화 방식 같은 보안 모듈도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옛 앱과 새 보안 구조가 서로 호환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앱에 덮어쓰기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은행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프로젝트 FIRST는 2023년 2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진행된 1단계 ‘프로젝트 O.N.E(Our New Experience)’에 이은 2단계 사업입니다. 하나은행은 SK C&C, LG CNS, 삼정 KPMG, PwC컨설팅과 협력해 2026년까지 완료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특히 하나원큐 재구축은 “단순한 UI 변경이 아닌 서비스 구조와 기능 전반을 새로 설계”하는 수준으로, 이 정도 규모의 재건축에서 기존 앱에 덮어쓰기가 불가능한 것은 기술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글쎄요?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갑니다. 은행 입장에서 보면, 오래 누적된 레거시를 계속 패치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다시 짓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더 안전하고 더 빠릅니다. 문제는 그 전환 비용을 누가 치르는가입니다.
2. 구글·애플 정책상 덮어쓰기가 불가능합니다
하나원큐처럼 앱을 완전히 새로 만들면 스토어의 앱 식별자가 달라집니다. 안드로이드에서는 Package Name, iOS에서는 Bundle ID라고 부릅니다. 이 식별자가 달라지면 스토어는 두 앱을 완전히 다른 앱으로 취급합니다.
- Google Play (AOS): 서명 키가 한 번 등록되면 변경할 수 없습니다. 앱을 새로 만들어 키가 바뀌면, 기존 사용자는 업데이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 App Store (iOS): Bundle ID는 등록 후 변경이 불가합니다. 같은 Bundle ID를 유지하면서 인증서만 교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코어 구조를 재설계한 경우 Bundle ID를 함께 바꿔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공통: 기존 사용자의 자동 마이그레이션은 양대 플랫폼 모두 지원하지 않습니다. 앱을 옮기면 키체인 데이터 접근이 끊기고, 모든 사용자는 자동 로그아웃되며, 로컬에 저장된 데이터는 사라집니다.
기존 앱에 덮어씌우는 ‘업데이트’는 플랫폼 정책상 불가능하다. 은행이 앱을 코어부터 다시 짓기로 결정한 순간, 사용자의 삭제-재설치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된다.
Apple Developer Forums · Google Play Console 정책 요약

이유를 이해하는 것과,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3. 만드는 사람이 애쓰지 않으면 쓰는 사람이 애씁니다

하나원큐 전환에서 사용자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존 앱을 찾아 삭제합니다. 앱스토어에 접속해 NEW 하나원큐를 검색합니다. 설치합니다. 공동인증서를 다시 등록합니다. 지문이나 얼굴 인식을 다시 설정합니다. 이체 한도를 다시 설정합니다. 자주 쓰는 계좌를 다시 등록합니다. 푸시 알림 설정을 다시 확인합니다.
단순히 버튼 한 번 누르는 일이 아닙니다. 60대 부모 세대라면 이 중 한 단계에서 막힐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콜센터 문의, 지점 방문, 가족의 지원이 늘어났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만드는 사람이 애쓰지 않으면 쓰는 사람이 애씁니다. 은행이 마이그레이션 도구를 개발하는 수고를 덜면, 수천만 명의 사용자가 각자 수고를 나눠 가집니다. 은행의 1의 노력이 사용자의 1,000만 개의 불편으로 환산됩니다. 저는 이것을 ‘애씀 총량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애써야 합니다. 문제는 누가 애쓰는가입니다.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은행이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닙니다. 회색 아이콘과 ‘(구)’ 표기는 사용자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설계된 시각 장치입니다. 알림톡으로 변경 사실을 고지한 것도 그렇습니다. 다만 그 다음 단계, 그러니까 실제로 앱을 삭제하고 재설치하고 재인증하는 여정에서는 사용자의 수고를 줄여줄 장치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4. 서비스가 죽지 않아도 경험은 죽을 수 있습니다
구글에는 killedbygoogle.com이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구글이 종료한 서비스 299개의 공동묘지입니다. Reader, Google+, Inbox, Stadia, Hangouts.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나원큐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NEW 하나원큐라는 이름으로 더 좋아진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재출시’지 ‘종료’가 아닙니다. 기술적으로는 ‘재출시’지 ‘종료’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원큐를 오래 써온 사용자들은 ‘익숙한 것이 죽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회색이 된 아이콘, 이름 앞에 붙은 ‘(구)’, 삭제를 요구하는 알림은 – 사용자 관점에서는 종료와 닮아 있습니다.
서비스가 죽지 않아도, 경험은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게 이번 사례의 가장 중요한 UX 시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을 크게 바꾸는 일은 언제든 필요합니다. 레거시를 끝까지 끌고 가는 건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치르는 일입니다. 다만 그 전환을 사용자에게 ‘삭제-재설치’로 통보하는 것과, ‘여정’으로 설계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존 앱에서 새 앱으로의 자연스러운 인도 화면, 설정 값을 옮겨오는 옵션, 이체 한도처럼 재설정이 번거로운 항목에 대한 프리셋 복원 – 은행이 개발 단계에서부터 고민했다면 가능했을 장치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앱 전환을 안내하는 설명 배너를 3개월 이상 유지하고, 마이그레이션이 자동으로 될 수 있는 방식을 지원하거나 은행을 방문하면 마이그레이션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일정기간 운영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까요?
하나원큐 아이콘이 회색이 되는 순간, 사용자에게는 자신이 오랜 시간 쓴 무언가가 영문도 모르게 ‘과거의 것’이 됩니다. 그 경험은 기술 문서에도, 인수인계 자료에도 남지 않습니다. 릴리즈 노트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의 어딘가에는 분명히 남습니다.
이유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비용을 왜 사용자가 치러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