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나눠 먹을 때부터 오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저는 면접에서 “왜 전공을 안 살리고 이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오가는 일이 오래 비효율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굽은 길을 저는 부끄러움으로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길을 다르게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늦깎이, 그리고 제너럴리스트.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서문에서 한 살 때부터 골프채를 잡은 타이거 우즈와, 온갖 종목을 전전하다 뒤늦게 라켓을 잡은 로저 페더러를 나란히 세웁니다. 우리는 늘 우즈의 이야기만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폭넓게 시작해 다양한 경험을 받아들인 ‘레인지(range)를 지닌 이들’이 의외로 더 멀리 간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네 갈래의 이야기를 적어 두려 합니다. 제가 걸어온 길, 그 길에서 만난 불안, 전문가라는 자리, 그리고 AI 시대에 사람이 끝까지 쥐어야 할 것. 천천히 적어 보겠습니다.

모임에서 함께 나눈 지적 대화의 쿠키들
발제문에 형광펜을 그어 둔 문장들
이번 독후감에서 제가 자주 멈춰 선 자리를 책 속 문장으로 모았습니다.
- “세상의 상당 부분은 〈화성 테니스〉다.” (p.55) – 규칙이 또렷하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감각을 건드린다.
- “폭넓게 시작하고,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곧 레인지를 지닌 이들.” (p.27) – 한 길로 곧장 오지 않은 나를 다시 마주보게 한다.
-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운다.” (p.230) – 나를 미리 다 알 수 없다는 게 불안이 아니라 여백이 된다.
- “우리는 곧 완성될 거라는 말만 계속 따라붙는 반제품이다.” (p.224) – 지금의 내가 완성형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큰 위로였다.
- “지식은 양날의 칼이다.” (p.254) – 아는 것이 동시에 못 보게 만든다.
- 멀리 떨어진 분야를 잇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공통의 깊은 구조를 식별하는 법”이다. (p.144) – 표면과 근본을 구분하는 일. 제가 늘 이야기해 온 감각이다.
1. 제너럴리스트를 다시 정의하다
먼저 오해 하나를 걷어 내야 합니다. ‘넓다’는 ‘애매하다’가 아닙니다.
제너럴리스트를 떠올리면 저는 종종 맥가이버칼을 상상했습니다. 기능 다섯 개를 다 가진 칼이요. 그런데 맥가이버칼은 십자드라이버 하나를 못 이깁니다. 여러 개를 애매하게 잘하는 것은 그래서 가치가 떨어집니다. 책이 말하는 레인지는 그런 얕은 잡탕이 아닙니다.
조직이 찾는 사람의 모양에는 이미 이름이 있습니다.
- T자형: 한 분야를 깊게 파고 넓게 협업하는 사람
- π(파이)형: 깊은 전문성을 둘 가진 사람
- Comb(빗)형: 여러 역량을 연결해 한 우물만 판 사람이 놓치는 일을 해내는 사람
깊이 가려면 오히려 넓게 파야 합니다. 모종삽으로 좁게 파는 것과 포크레인으로 넓게 들어가 깊이 닿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을 오래 의심했습니다. 한 우물이 마르면 갈 곳이 없습니다. 여러 우물을 오간 사람이 물길이 어디서 만나는지를 압니다. 깊이는 한곳에 머문 시간이 아니라 여러 곳을 파 본 감각에 더 가깝습니다.
문득 습설이 떠올랐습니다. 깊은 추위에서 내린 눈은 가볍고 보송합니다. 어는점 부근의 어정쩡한 온도에서 내린 눈은 수분을 머금어 무겁습니다. 애매하면 무거워집니다. 그러니 경계할 것은 넓음이 아니라 어정쩡함입니다.
10년 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통섭형 인재’라고 불렀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말라는 말은 그만큼 오래됐고, 지금도 유효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총, 균, 쇠』를 자주 꺼냅니다. 최재천 교수가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를 “완벽한 의미의 통섭학자”라고 부른 추천평 때문입니다. 이 책은 1997년에 나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2. 불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엡스타인이 인용한 ‘다크호스 프로젝트’는, 자기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거창한 장기 계획이 아니라 단기 계획으로 움직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내게 가장 잘 맞는 게 뭔지 묻고, 아니면 가볍게 바꾸는 태도였습니다(p.221).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미리 알고 출발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배웁니다(p.230).
그런데 저는 왜 가볍게 시험해 보고, 아니다 싶을 때 또 가볍게 바꾸지 못할까요. 생각해 보면 불안의 결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편안해서 불안합니다. 하던 일에 변화가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편해서 불안합니다. 자꾸 바꿔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오갑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불안을 마주합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올까요. 불안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모르니 누르게 되고, 누르다 보면 강박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불안은 없애야 할 결함일까요. 저는 천선란 작가의 글 한 편을 떠올립니다. 잠 못 드는 밤을 강박적인 루틴으로 견뎌 온 사람에게, 수진 작가가 고가 다리를 건너며 한마디를 던집니다.
“불안을 에너지로 잘 사용하네요.”
천선란
사람은 저마다 다른 에너지를 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건 불안입니다. 불안이 나를 움직이고, 공부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면,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연료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책과 포개진다고 느꼈습니다. 엡스타인은 우리를 ‘곧 완성될 거라는 말만 따라붙는 반제품'(p.224)이라고 적었습니다.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는 그 미완성이, 천선란 작가가 말한 에너지로서의 불안과 같은 자리에 섭니다.
3. 전문가라는 자리, 그리고 한 발 바깥
두 번째 의심은 전문성을 향합니다. 직함과 연차는 쌓였는데, “나는 진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맞나” 싶습니다. 리서치와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저에게 익숙한 질문입니다.
엡스타인은 불편한 사실을 들이댑니다.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판단조차 과거 경험이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p.37). 이걸 보여 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아인슈텔룽 효과입니다. 1942년 에이브러햄 루친스의 물병 실험에서, 같은 해법을 여러 번 반복한 사람들은 더 간단한 길이 있어도 익숙한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경험이 늘 실력이 되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격언이 있습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카플란이 1964년에 ‘도구의 법칙’으로 처음 정리했고, 매슬로가 1966년에 다듬었습니다. 책의 표현으로는 지식이 양날의 칼입니다(도밍고스, p.254).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동시에,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못 보게 만듭니다.
저는 경험이 실력이 되는 순간과 고착이 되는 순간을 가르는 선이 궁금했습니다. 그 선은 한 발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전문가가 되더라도 한 발을 자기 세계 바깥에 딛고 있으라고 권합니다(p.56). 익숙한 방법론을 꺼내기 전에 ‘이게 어떤 종류의 문제인가’를 먼저 묻는 일입니다. 사용자를 이해하는 일과 나를 이해하는 일은 닮았습니다.
4. AI 시대, 사람이 끝까지 쥐는 것
AI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대체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느 분야에서나 통하는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싶습니다. 먼저 시야를 넓혀 봅니다. ‘AI 시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의 충격과 닮았습니다.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를 본 화가 폴 들라로슈가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회화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진이 태어났고, 화가들은 사실의 재현에서 추상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변화는 그림을 쓸모없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옮겼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AI는 결정적일 수 있을까요. 60점은 만들지만 100점은 어려운 시대에, 정말 대부분의 직업이 대체될까요. AI가 개척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답을 갖지 못했습니다.
노션 창업자 이반 자오의 글 ‘Steam, Steel, and Infinite Minds’가 단서를 줍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마음의 자전거’라 부른 표현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아직도 정보 고속도로 위에서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AI와 함께라면 자전거에서 내려 자동차로, 자율주행차로 갈아탈 수 있습니다. 다만 두 가지가 먼저입니다. 흩어진 도구를 하나로 묶는 맥락 통합, 그리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검증 가능성입니다.
여기서 UX의 무게중심이 옮겨 갑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용자가 도구를 얼마나 쉽고 유용하게 쓰는지(Using)를 물었습니다. 앞으로는 얼마나 믿고 맡기는지(Delegating)를 묻게 됩니다. 어댑티브 크루즈와 테슬라 FSD가 전혀 다른 경험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리서처의 일은 사람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신뢰의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결과를 쉽게 검증할 환경을 만드는 쪽으로 옮겨 갑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AI가 평균을 빠르게 채우는 시대에, 사람이 끝까지 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꼽은 것은 셋입니다.
- 라이센스: 의사·약사·변호사처럼 행위 자체를 제한하는 자격과 그에 따르는 책임
- 커뮤니티: 연결과 위로가 되는 모임의 다정함
- 쓸모없음과 품격: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 마음, 정수기 옆 종이컵이 하나 남았을 때 다음 사람에게 양보하는 마음
효율과는 거리가 먼 이 품격이, 100점이 흔해진 시대에 오히려 사람의 자리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직선이 표준인 곳에서
엡스타인의 답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는 빠른 몰입이 늘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상당 부분 규칙이 흐릿하고, 그런 곳에서는 더디고 자주 틀리는 학습이 길게 보면 더 단단해진다고 말합니다(p.136). 어차피 지금의 우리는 ‘덧없는 존재'(p.225)입니다. 어제의 나로 오늘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네 갈래의 마음이 한자리에서 만납니다. 굽은 길을 재료로 읽는 마음, 불안을 연료로 바꾸는 마음, 익숙함 바깥에 한 발을 두는 마음, 빠른 직선이 표준인 곳에서 느림을 견디는 마음.
성과가 빠르게 측정되고 칭찬받는 세상에서, 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나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아직 답을 못 찾았지만, 한 발을 바깥에 두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니 그 여정을 함께할 안전한 자리를 기약하며, 다음 모임에도 잔잔하게, 단단하게 만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운다” – 데이비드 엡스타인
책과 함께 나눈 콘텐츠
알아두면 쓸모있는 것들
모임에서 오간 개념을, 처음 듣는 분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짧게 풀었습니다. 더 알고 싶을 때를 위해 각 용어에 공신력 있는 자료를 연결해 두었어요. 굵게 표시된 용어를 누르면 새 창에서 열립니다.
- 레인지(Range)·제너럴리스트: 한 분야만 일찍 파고드는 ‘조기 전문화’와 달리, 여러 분야를 폭넓게 경험하며 늦깎이로 자기 길을 찾는 사람. 이 책의 원제이자 핵심 개념으로,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를 다룬다.
- T자형·π형·Comb형 인재: 한 분야를 깊게 파면서(세로) 옆 분야와도 협업할 수 있는(가로) 사람이 T자형이다. 깊은 전문성이 둘이면 π(파이)형, 여럿이면 Comb(빗)형이라 부른다. 넓이와 깊이를 함께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 통섭(Consilience): 자연과학과 인문학처럼 갈라진 지식을 잇는 ‘함께 넘나듦(jumping together)’. 에드워드 윌슨이 제시하고 최재천 교수가 우리말 ‘통섭’으로 옮겨 한국에 알렸다.
- 아인슈텔룽 효과(Einstellung effect):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도 익숙한 방식만 기계적으로 고집하게 되는 심리 현상. 1942년 루친스의 ‘물병 실험’에서 이름이 나왔으며, 숙련될수록 오히려 빠지기 쉽다.
- 도구의 법칙(망치의 법칙):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익숙한 도구·지식에 지나치게 기대어 다른 가능성을 못 보게 되는 경향. 카플란(1964)이 정리하고 매슬로(1966)가 다듬었다.
쉬운 것과 어려운 것 –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발제문 말미에 함께 읽은 목록입니다. 1956년 거창고를 맡은 전영창 교장의 교육철학을 훗날 정리한 것으로, 강당 뒷벽에 걸려 지금도 졸업생들의 직업 선택에 ‘브레이크’처럼 작동한다고 전해집니다.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트레바리 시즌8, 첫 번째 모임을 마치고 – Jumping Together – 경계와 규칙이 흐려지는 시대에 한 분야의 깊이를 쥔 제너럴리스트를 이야기한 첫 모임의 기록. 손현 『경험을 기획하는 일』을 함께 읽었습니다.
출처
-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 데이비드 엡스타인, 원제 RANGE(2019), 이한음 옮김, 열린책들(2020). 부제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
- 습설 – 어는점 부근에서 부분적으로 녹으며 수분을 머금어 건설보다 2~3배 무겁다. AccuWeather, “The Difference Between Wet and Powdery Snow”.
- 『총, 균, 쇠』 – 1997년 출간, 1998년 퓰리처상(일반 논픽션). The Pulitzer Prizes.
- 천선란 – 〈불안을 잘 사용하네요〉, 선란의 독일 일기.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2019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저자.
- 폴 들라로슈 –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1839년경 귀속). Art & Object, “From Today Painting is Dead”.
- 이반 자오 – “Steam, Steel, and Infinite Minds”. Notion 공식 블로그(2025-12).
-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 – 전영창 교장(1917~1976)의 교육철학을 아들 전성은 전 교장 등이 10가지로 정리. 거창고 강당 게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