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원가족의 고약한 성격, 어떤 사람과의 관계, 내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따라야 하는 외부의 요구, 정신질환이 있는 가족의 치료 거부.
심리치료 장면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어 오랜 노력을 기울이다 소진되고 슬퍼진 분들입니다. 언젠가 돌아보면 바뀔 리 만무했음이 명확해지지만, 착각은 여러 곳에서 시작되어 나를 계속 애쓰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바뀔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 사람 인생에 내가 중요한 줄로만 알았고,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중요줄로만 알았으며, 내게 그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뀔 듯 행동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까지 바꿀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그에게 내가 중요한 줄 알았지만 그는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둘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그가 중요한 줄 알았지만 나는 굳이 그가 아니어도 되었으며, 내게 그를 바꿀 힘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나를 바꾸는 데 내 힘을 우선 배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건강한 방법이었습니다.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몇 달, 몇 년째 하다 보면 이 정체된 상황을 좀처럼 타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됩니다. 사실 가치가 없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음에도, 타인과 환경의 견고한 고집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나를 탓하며 소득 없는 노력을 되풀이합니다.
상담 중 신뢰관계, 즉 라포(rapport)가 잘 형성되었을 때 내담자에게 이런 말을 건넬 때가 있습니다. “여우처럼 싸우세요, 곰말고. 이기는 싸움을 먼저 하세요.” 더 구체적인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그 방법을 아직 모를 뿐이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미 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영리한 싸움의 방법은 달라지기에 지금 이 책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싸움 전에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은, 이 싸움이 어디로 흘러갈지에 관한 예측입니다. 단지 몇 분 후의 일을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몇 수 앞을 내질러 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기는 데에는 운도 따라야 하기에 이기는 싸움을 미리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반면 현재로선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변별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정말 많은 방법을 써본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생각해볼 때 상대가 바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 것 같나요? 이길 수 있는 싸움에 먼저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싸움이 이길 수 있는 싸움 맞나요? 이길 수 있을 때를 우리가 선택하는 건 어떨까요?”
이 질문만으로도 내담자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오갑니다. 보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의 결말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물론 살면서 매번 이기는 싸움만 골라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힘이 충분치 않을 때라면, 지금은 가능한 한 전략적으로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보호해야 할 사람이 생기면서(그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요), 또 마음이 적당히 단단해지고 적당히 유연해지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지게 될 싸움에도 어련히, 기꺼이 참전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우선 물러서야 할 때를 읽어야 합니다.
다시, 당신에게로 운이 기우는 때가 옵니다. 원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제대로 과거의 일에서 자유로워질 기회가 옵니다. 그러니 지금은 가지 않아도 되는 길에 서서 슬퍼하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노력을 안 해본 게 아닙니다. 그가, 환경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그들은 영원히 준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 탓인가요?
나는 당신의 그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결과가 예견되는 싸움들에 머물러 끝내 그 끝을 확인하려는 분들은 먼저 이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착각 때문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마음의 에너지가 그곳에 남습니다. 시험을 한참 보던 도중 갑자기 시험지가 회수되어 미완성 과제로 남는 경우 시험문제를 유독 잘 기억하게 된다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ck Effect)’ 연구로도 입증된 바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불쾌감으로 자꾸 이전에 실패했던 일로 회귀합니다.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같은 싸움을 되풀이하며 상처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쏟아붓는 노력이 변하지 않는 상수라 해도, 타인의 역사와 역동은 너무 큰 변수입니다. 대인관계에서 미완으로 남는 일은 모두에게 무수히 많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꽉 닫힌 행복한 결말이 제일 좋겠지만, 확률상 열린 결말일 가능성이 제일 높고, 흔한 일입니다. 그 일을 굳이 본인이 끝맺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의 삶에 구원자가 되려는 동기를 가진 경우도 있습니다. 혼자만의 선의를 갖고서,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실효가 없는 접근을 지속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타인의 삶에 영향력과 통제감을 미치려는 욕망을 최대한 빨리 인정하고 전두엽에 힘을 줘 이를 막지 않으면, 본인의 열패감과 분노만 짙어지거나 ‘사이비 교주’ 마인드를 갖춰나가기 십상입니다.
만일 심리학과 학부생이나 임상심리 수련과정에 있는 분들이 이런 마음을 내비친다면, 지도교수 혹은 지도감독자는 가능한 한 빨리 이 초심자의 역동을 파악해 수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제야 이 초심자는 현실적인 수준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습니다.
이기지 못할 싸움에 계속 노력을 투입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서’입니다. 회수할 수는 없는 투자 비용, 노력, 시간에 따른 마음의 매몰 비용(Sunk Cost)이 이미 크기 때문이지요.
그동안의 내 희생과 시도가 끝내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심리적 비용을 퍼붓는 이 매몰 비용의 오류는 강력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나를 챙겨야 할 때에 소모전을 거듭합니다. 더욱이 ‘손절’을 당해 보기만 했지 해보지는 못한 분이라면, 손을 털고 그 판을 빠져나오는 일이 행동의 옵션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포기는 우리 마음의 기능 최적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미덕입니다. 지금의 도전을 지속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세 가지 체크리스트가 유용합니다.
-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그보다 더 노력할 수 없다
- 성과나 변화가 미미했다
- 사실 꼭 이길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이 세 단계 필터를 거쳐 모두 ‘그렇다’는 답이 나올 경우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포기하세요. 그 길, 아니에요.
정해둔 노력의 시간이 다하면 손 한번 탁탁 털고 내 과업의 완료를 선언하세요. 그 상태로 휴전일 수도, 종전일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나머지 싸움은 외부의 적합한 전문가에게, 때론 최적의 적수에게 의뢰하고, 내 마음은 거둬 가세요. 다른 곳에 가져다 쓰면 더 잘 쓸 수 있는 당신의 에너지임을 차차 알게 될 테니, 일단 갖고 계세요.
사실 이 분투가 길어지고 패색이 짙어질 때 우려되는 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 자체도 걱정이지만 외로움이 또다시 이 불리한 싸움을 더 불리하게 만들지 모르니 주의해야 합니다.
시카고대학교 심리학자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 교수가 10년 동안 추적 연구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외로움은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초점적 사고(Self-Centeredness,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한다)를 증가시킵니다. 이후 자기초점적 사고는 다시금 외로움에 영향을 미치며 이 둘은 상호 강화됩니다.
그러나 타인도 나처럼 자기만의 역동, 동기, 역사에 기반해 나름대로 조직화된 의사결정을 하는 하나의 고도의 지적생명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나의 고통감과 답답함만 가중되고 헛발질을 하기 쉽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 사람도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압니다. 내 논리와 다를 뿐이지요.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일부도 아니며,
다만 그 사람 환경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환경의 일부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자기초점적 사고에 몰두하면 현재 상황을 고려한 실용적 판단력이 저하되기 마련입니다. 전세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데 사용할 사회적 기술이나 심리적 자원이 모두 나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불리한 판세라면 전략상 물러서야 하는데 나를 중심에 둔 철 지난 ‘천동설’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영리한 싸움을 위해 자기객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자기 자신과 상황을 타자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냉정한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그제서야 반격의 길일을 현실적으로 택할 수도 있고, 바람의 방향을 바꿀 의외의 돌파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특정한 관계에 너무 몰입해 있거나 외로움에 압도되어 그 일의 중요도를 과장해 평가하고 있었다면, 객관화를 통해 지금 그 싸움에서 이기는 일이 내 인생에 아주 그렇게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주위 반경 1미터짜리 황무지 같은 전장에서 눈을 돌려 다만 몇 발자국 옆을 보면, 오프라인에도 SNS에도 당신과 함께 감정과 위로와 유대감을 나누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떡볶이를 들고, 계절 한정 아이스크림을 들고, 새로 나온 드라마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들고 있는 싱거운 사람들요.
당신은 실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요.
그러나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를 정하기엔 이제 힘이 약합니다.
혹시, 지옥 같았던 상황, 그리고 당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요? 과거의 대처를 반복하고 있을까요? 아뇨, 아닐 겁니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 그 사건들은 나에게 더는 그때만큼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지형도에 위치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사건이 일어난 지점보다 더 높은 곳에, 혹은 아예 판을 바꿔 만든 새로운 지도 위에 지금의 내가 서 있습니다. 내가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강점과 약점,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에 대해 계속 배우면서, 나는 그때보다 훨씬 성장했습니다. 자존감이나 심리적 성숙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익혀왔습니다. 이제 나를 해칠 수 있는 것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만큼,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내가 변해 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정말 당신이 싸워볼 만하겠다 싶을 때, 제대로 당신 이야기의 종결을 보고 싶다면, 네 그것도 응원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하기 위해 굳이 상대가 서 있는 곳으로 내려서려 하지 마세요. 당신과 그의 위치는 다릅니다. 당신이 눈치채기 훨씬 전부터.
Source: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