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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떤 양형 이유

   현직 판사가 책을 내는 게 이제는 드문 일도 아니지만, 책 낼 시간 있으면 재판이나 열심히 하라는 타박이 신경 쓰였다. 남의 노동은 주 52시간 칼같이 따지지만 제 노동은 주 72시간을 수시로 넘나들어도, 판사들 노는 꼴을 못 보는 곳이 법운이다. 사건은 잠깐만 손을 놓아도 턱밑까지 차오른다. 틈틈이 사건 밖으로 고개를 빼 호흡하지 않으면 익사할 지경이니, 그런 타박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데 판결 밖 수다로 구설에 오르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 정말 재판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다. 시답잖은 사건이 대개 그렇듯 이 책도 청탁에서 비롯되었다. <법률신문> 모 기자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짧은 칼럼 몇 꼭지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책 내는 건 자기 마음 아닌가라는 자문에 자답이 궁해졌다. 생각해보니 기자는 핑계였다.나의 내밀한 욕망이 칼럼 청탁과 출판 제안을 호객하듯 부른 것이다.
   판결문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해 일정한 법률 효과를 부여할 뿐 모든 감상은 배제하는 글이다. 민사든 형사든 판결문은 매우 엄정한 형식과 표현을 써야 하는데,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형사 판결문의 ‘양형量刑 이유’ 부분이다. 양형 이유는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곳이다. 죄질이나 전과, 피해변제(합의) 여부, 재범의 위험성 등을 주로 기술한다. 형사합의부 판결은 사안이 중하므로 대개 양형 이유를 기재하나, 형사단독부 판결은 생략하는 경우도 흔하다. 나 역시 대부분 전형적인 내용을 쓰지만,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는 양형 이유를 공들여 쓰곤 한다. 재판기록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쇄하지만 판결문은 영구보존되므로, 판결문에 사건의 내용과 양형 이유를 상세하게 기재해 그 사안을 항구적으로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나는 그곳에서 법적 평가로 소실돼버린 구체적 인간과 그들의 고통 일부를 복원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록 뒷면의 눈물을 전부 담을 수는 없었다. 표현되지 못한 그들의 아픔과 나의 번민은 고스란히 내 가슴에 묻어왔다. 이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판결문의 형식과 전혀 다른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두려웠으나 뭔가에 홀리듯 그러자고 했다. 판결문이라는 건조하고 비정한 서사, 그 장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사연들, 그 비감 悲感한 서정을 풀어놓지 않고서는 결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역법관제나 고등부장 승진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별볼일없는 판사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경판京判’도, 순환근무 때만 지방으로 가는 ‘흑판黑判’도, 서울바닥만 돈다는 전설의 ‘백판白判’도 아니다. 나는 글자 그대로 시골판사, ‘향판鄕判’이다. 제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호칭만으로 반은 접고 들어가는 데다 어감마저 촌스럽기에 향판들은 늘 분하고 서러웠다. 지역 TO로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에 오른 모 향판은 자신을 ‘농어촌 특별전형’이라고 자조할 정도였다.
   고등부장으로 승진하기 위한 판사들의 분투는 산 사람을 향해 아귀다툼하며 돌진하는 좀비들처럼 눈물겨웠다. 시골에서도 인품과 실력을 겸비하거나 줄 좋은 향판들이 고등부장 승진을 꿈꾸기로 헀다. 하지만 사실 재야(법원과 검찰 밖을 통칭한다) 출신이라 승진과 무연고인 나는 진성 향판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근자에 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늘었는데,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과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이 그것이다. 이 명칭은 포청천을 연상시키는 어감이라 카리스마도 있는 데다, 법원행정처에서 특별관리가 필요하다며 각별히 붙여준 명칭이라 애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승진을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리다 고꾸라지자 법관의 신분 보장을 방패 삼아 누구 눈치도 보지 않게 되었다는 승포판들도 한때는 승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는 또 다르다. 나는 7년을 변호사로 일하다 법원으로 온 재야 출신 승무판(승진과 무관한 판사)이었고, 이들과 같은 분노나 상실감 없이 그저 법원에 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변호사들만 그런 줄 알았는데, 법원은 법원대로 세간의 비난에 힘겨워했다. 법원의 존립 기반은 국민의 신뢰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어떻게 하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까, 모두 노심초사했지만 내가 보기엔 전부 부질없었다. 재판이 멈추지 않는 한 세상욕이란 욕은 법원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이치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또 그렇게 욕을 먹었으면 이력이 날 법도 한데 판사들은 욕을 먹을 때마다 다들 힘들어했다.
   나는 아니었다. 변호사 시절 무수한 욕을 먹어 단련된 맷집이 있었고, 판사인 것이 마냥 신기하고 행복했기에 판사로 욕을 먹는 것도 좋았다. 내게는 법원에 대한 불신이 그저 악플이 좀 많이 달리는 정도, 밤길 조심하라는 정도, 네 애들 학교 어딘지 안다는 정도, 네 가족도 한번 당해보라는 정도, 인터넷에 개인 신상이 까발려진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재판이 마음에 안 든다고 총 맞는 나라도 있다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다 감수할 수 있었다.
   정의도 뜬구름 잡는 얘기였다. 미국의 한 교수가 선승들의 ‘이뭐꼬’ 화두를 흉내 내듯 ⟪정의란 무엇인가⟫(2010)라는 책을 냈을 때, ‘이건 판사를 위한 책’이라고 쾌재를 불렀지만, 선문답 빰치는 내용에 고개만 갸우뚱하며 책을 덮었다. 좋은 책이었지만 실제 재판에서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향판이든, 승무판이든, 욕을 먹든, 정의가 뭐든, 사건에 빠져 죽든, 목만 빼고 숨 쉬든, 그저 판사이기만 하면 행복했던 나는, 그렇게 쭉 행복할 줄 알았다. 매에 장사 없고, 가랑비에 옷 젖고, 잔 펀치에 나가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성년 남자들이 꾸는 악몽 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아마 다시 입대하는 꿈이 아닐까? 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다시 시험을 치르는게 지독한 악몽이다. 사시에 떨어지고 다시 군대 가는 꿈은 최악이다. 꿈에서도 억울하고 기가 차니 악을 쓰며 깨곤 했다. 언제부턴가 사시준비와 입대, 심지어 학력고사까지 다시 치르고, 법대法大가 아닌 피고인석에 서서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황당해하는 악몽이 잦아졌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판사라서 행복한데, 왜 이럴까? 판사생활이 길어지며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행복의 총량 대신 불면과 악몽의 나날이 늘었다. 불면은 두통과 소화불량이 되고, 소화불량은 미란성 위염이 되고, 급기야 이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법원은 물론 나에 대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도 신경 쓰지 않는 내게 왜 이런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안 사실이지만 나를 힘들게 한 건, 리메이크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를 미치게 한 아이의 환영과 정확히 일치했다. 국민의 신뢰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내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지만, 재판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빛은 고스란히 누적되어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소년재판을 할 때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 소년원으로 가며 울부짖던 눈빛,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 더 당황하던 눈빛, 법정구속되어 유치감으로 들어가는 피고인의 눈빛, 전 재산을 사기당한 피해자의 눈빛, 성폭행 피해 여성의 분노와 수치심 가득한 눈빛, 꽃 같은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빛, 빛에 쫓겨 떠도는 파산자의 눈빛, 퇴근해서 집으로 오지 않고 영정사진 속으로 가버린 아빠의 눈빛, 그 아빠의 영정 앞에 선 가족들의 눈빛, 눈빛…. 그 눈빛들은 <매드 맥스>의 아이처럼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읹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들은 집요하게 따졌다.
   ‘당신은 구할 수 있었잖아요. 당신이 우리를 버렸잖아요. 당신은 그럴 힘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정의를 맡겼잖아요. 정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판사들이 쓰는 은어 중에 ‘깡치사건’이라고 있다. 판단이 어려운 사건, 재판부를 몇 개나 거쳐온 사건, 누구도 처리하지 않은 채 캐비닛에 처박아둔 사건, 결론이 보이지 않는 사건, 조정도 안 되는 사건, 장기미제사건 등을 일컫는 말이다. 책을 쓰는 내내 이 책이 마치 복잡한 깡치사건의 기나긴 판결문처럼 느껴졌다. 개별 사건 판결문의 독자가 재판 당사자와 상급심이라면, 이 책의 독자는 사법부에 정의를 맡겨둔 국민이다. 개별 사건 판결문이 당사자와 상급심을 상대로 결론의 정당성과 추론의 합리성을 설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책은 과연 나 같은 자들에게 정의를 맡겨도 될지를 판단하기 위한 일종의 참고자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곧 1심 판결문이고, 독자는 당사자이면서 곧 상급심이다. 상급심은 1심의 결론을 받아들여 판결을 인용할 수도 있고, 결론이 틀렸다고 파기할 권한도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봐, 당신은 틀렸어. 판사로서의 당신 삶을 파기한다”는 주문注文을 낼 수도 있고, “결론은 용케 맞췄군. 이 판결을 인용한다”는 주문을 낼 수도 있다. 염치없게도, 이 판결이 일부라도 인용되기를 바라지만, 전부 파기되어도 항소는 없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금십이다.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매드 맥스가 되지 않게 언제나 지지해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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