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까지 UT 가능해요?” PM으로 일하면서 이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개발 일정은 확정됐고, 디자인 시안도 나왔고, 리더에게 “다음 스프린트에 넣겠습니다”라고 보고까지 했는데 — UX 리서처가 “이 일정으로는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답답하죠. 급하지 않은 요청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UX 리서처로서 오래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 거절이 프로젝트를 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리는 순간이라는 것을요.
1. 우리는 왜 “빨리”에 끌리는가

프로덕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정 압박은 숙명입니다. 개발 리소스는 언제나 부족하고, 출시를 미루자는 말은 모두가 꺼립니다. 그래서 “대충이라도 확인만 하자”, “3명이라도 빨리 돌리자”는 유혹이 생깁니다.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 중에서
디지털 프로덕트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에 쫓겨 만든 기능은 출시 후 더 큰 비용을 만듭니다. 고객이 이탈하고, 다시 고쳐야 하고, 개발 리소스를 또 잡아먹습니다.
2. 사용성 테스트, 실제로 얼마나 걸리나
UX 리서치의 핵심 방법 중 하나인 사용성 테스트는 단순히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반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데이터 기반 문제 정의부터 시작해서, 가설 수립, 방법론 결정, 참여자 섭외, 프로토타입 준비, 테스트 진행, 분석, 반복 검증까지 — 총 11단계를 거칩니다.
- 사용성 테스트(Usability Test, UT): 실제 사용자가 프로토타입이나 제품을 직접 사용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사용성 문제를 발견하는 리서치 방법.
제이콥 닐슨(Jakob Nielsen)의 연구에 따르면 5명만 테스트해도 1/3 확률(발견 확률 33% 이상)로 나타날 수 있는 주요 사용성 문제의 약 85%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5명 기준 테스트 자체는 150분(1인당 약 30분) 정도면 되지만, 이건 11단계 중 한 단계의 시간일 뿐입니다. 리서치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최소 1주일이 필요합니다. 핵심 기능이라 오류 가능성을 10% 이내로 줄여야 한다면 18명까지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며칠이 필요한 건데요?”라고 물으신다면, 정직하게 답하겠습니다.
- UT만 해도 최소 5영업일
- 인터뷰까지 포함하면 2주
이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리서치를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3. 리서치 오퍼레이션이 바꾸는 속도의 기준
그렇다고 “무조건 느리게”가 답은 아닙니다.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흐름이 리서치 오퍼레이션(ResearchOps)입니다. 리서치의 본질인 ‘사용자 이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반복적인 운영 업무를 체계화하고 자동화하는 것입니다.
- 참여자 리크루팅
- 일정 조율
- 인터뷰 운영
- 사례비 지급
- 리서치 오퍼레이션(Research Operations, ResearchOps): UX 리서치 수행에 필요한 운영 전반(참여자 모집, 일정 관리, 데이터 관리, 사례비 정산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실천. Nielsen Norman Group이 정의한 6대 영역(참여자 관리, 거버넌스, 지식 관리, 도구·인프라, 인재 개발, 연구 지원)으로 구성됩니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토스(Toss)입니다. 토스는 리서치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저 리서치 팀과 별도로 ‘리서치 플랫폼 팀(리플팀)’을 분리했습니다. 이 팀은 단순히 리서처 대신 행정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리크루팅 프로세스의 본질적인 비효율을 찾아 해결합니다.
토스 앱 내에서 사용자가 직접 인터뷰를 신청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A/B 테스트와 UX 라이팅 개선을 거쳐 리크루팅 소요 시간을 최대 90분에서 15분으로 단축했습니다.
또한 제품팀(PM, 디자이너)이 당장 다음 날이라도 사용자를 만나 UT를 할 수 있는 ‘유저무물데이’ 프로그램도 운영 중입니다.
리서치 오퍼레이션이 잘 갖춰진 조직에서는 “수요일까지 가능해요?”라는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거절의 이유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거절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4. AI 시대, 거절의 이유는 오히려 늘었다
2026년 현재, AI 리서치 도구는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Lyssna가 2025년 12월 100명의 현직 UX 리서처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88%가 ‘AI 기반 분석(AI-assisted analysis)’을 2026년 UX 리서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트렌드로 꼽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리서처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진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AI가 가속해주는 건 ‘데이터 처리’이지 ‘맥락 판단’이 아닙니다.
- “이 사용자가 왜 3초간 머뭇거렸는가”
- “이 표현이 한국 40대 사용자에게 어떤 감정을 유발하는가”
이런 질문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입니다. AI는 할루시네이션을 일으킬 수 있고, 정성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오독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5건의 감정 분석 결과를 “사용자의 80%가 부정적”이라고 일반화하는 순간, 리서치의 신뢰성은 무너집니다.
-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AI가 학습 데이터에 없는 내용을 그럴듣하게 생성해내는 현상. 리서치 맥락에서는 AI가 인터뷰 전사 내용에 없는 발언을 요약에 포함하거나, 데이터에 근거 없는 패턴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합성 유저에만 의존해 빠르게 결론을 내리면, 실제 사용자의 맥락을 놓치는 자동화 편향이라는 새로운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같은 Lyssna 조사에서 48%의 리서처가 합성 유저를 주요 트렌드로 꼽으면서도, 동시에 품질과 과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 합성 유저(Synthetic User): 실제 사용자 대신 AI가 시뮬레이션한 가상의 사용자. 빠른 테스트 사이클과 비용 절감의 장점이 있으나, 실제 사용 맥락의 깊이와 정확성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5. 거절 대신 ‘재협상’하는 법
그렇다고 리서처가 매번 “안 됩니다”만 하면 협업이 무너집니다. 핵심은 거절이 아니라 재협상입니다.
· 일정이 부족할 때
“전체 UT는 어렵지만, 핵심 태스크 2개만 사내 테스트로 빠르게 확인하겠습니다.”
리서치 오퍼레이션이 갖춰진 조직이라면, 간이 UT를 당일 또는 익일에 실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문제가 불명확할 때
“먼저 30분만 시간을 내서 ‘이번 리서치로 무엇을 알고 싶은지’ 정리하면 어떨까요?”
· 결과 반영이 어려울 때
“이번 스프린트에 반영이 어렵다면, 리서치 리포지토리에 기록해서 다음 분기 로드맵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리서치 리포지토리(Research Repository): 과거 리서치 결과물(인터뷰 기록, 분석 보고서, 인사이트 등)을 체계적으로 저장·관리하는 시스템. 중복 리서치를 방지하고, 과거 인사이트를 새 프로젝트에 재활용할 수 있게 합니다. Dovetail, Notion, Condens 등의 도구가 사용됩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도 결국 방망이를 팔았습니다. 다만 자기 기준을 지키며 팔았을 뿐입니다. 리서처의 거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하겠다”가 아니라,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Key Takeaways
리서치 없이 출시된 기능은 진통제와 같습니다. 당장의 통증을 줄여주지만 원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시간을 들인 리서치는 치료제입니다. 근본 원인을 찾아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게 합니다.
Q. UX 리서처가 “아니오”라고 말할 때, 그건 PM을 거부하는 것인가?
A. 아닙니다. 함께 만드는 프로덕트의 품질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PM이 리서처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때, 그건 일정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출시 후 재작업 비용을 줄이는 투자입니다.
📖 이 글에 영감을 준 책

이 글은 《UX 리서처의 일》(레드버스백맨 저, e비즈북스)에서 영감을 받아 2026년 현재의 맥락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