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산미가 많은 원두와 적은 원두를 고르고, 귀리 우유 라떼를 주문하고, 디카페인 옵션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건 커피 시장이 커지면서 세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맥주도 마찬가지죠. IPA, 무알코올 맥주를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건 시장이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UX 업계도 같은 흐름을 겪고 있습니다. “UX 디자이너”라는 하나의 직군이 리서치, 라이팅, 시스템, 디자인으로 쪼개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역할 하나가 있습니다. 모두가 확신할 때 의심하는 사람 — UX 리서처입니다.
1. 쿠팡이 유일했던 시절
2015년, 국내에서 UX 리서치 전담 조직을 갖추고 신규 기능 출시 전에 사용성 테스트를 진행하는 기업은 쿠팡뿐이었습니다. 이후 우아한형제들, 비바리퍼블리카, 오늘의집(버킷플레이스)에서 3명 이상의 UX 리서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UX 리서치’라는 개념이 국내 테크 업계에 자리 잡기 시작했죠.
2022년에는 당근마켓,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 야놀자, 무신사, 화해(버드뷰) 등 10개 이상의 기업이 UX 리서처를 채용했습니다. 디자인 도구가 포토샵에서 스케치로, 다시 피그마로 바뀐 것처럼, 한국 UX 업계는 글로벌 기업의 조직 구조를 빠르게 벤치마킹해왔습니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 글로벌 경기 침체와 함께 겨울이 왔습니다. UX 리서처 채용은 크게 줄었고, AI가 리서처를 대체할 수 있다는 과장된 서사도 퍼졌습니다.
2. 2026년 봄, 세 가지 변화
다행히 2025년을 지나면서 UX 채용 시장은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NN/g(Nielsen Norman Group)의 2026 ‘State of UX’ 리포트에 따르면 UX 관련 팀 규모가 다시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며, 일부는 성장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회복의 모양이 이전과 다릅니다. 시니어와 제너럴리스트 포지션이 먼저 회복 중이고, 주니어 채용은 여전히 경쟁이 치열합니다.
-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리서치, 디자인, 전략 등 여러 역할을 넘나드는 다면적 역량을 가진 실무자. 반의어는 특정 방법론이나 도구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주목할 변화가 세 가지 있습니다.
① 직군의 세분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풀스택 UX 디자이너’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던 시대에서, UX 라이터, 디자인 시스템 엔지니어, UX 리서처, 서비스 디자이너가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독립 직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건 업계가 축소되는 게 아니라 커피 시장이 스페셜티로 진화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② 리서치가 프로덕트 조직에 내재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리서치팀이 별도 조직으로 존재했다면, 이제는 프로덕트 스쿼드 안에 리서처가 PM, 디자이너와 함께 앉는 구조가 늘고 있습니다. 당근마켓이 대표적으로, 동네생활 스쿼드 안에 리서처가 배치되어 기능 기획 단계부터 사용자 데이터가 의사결정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③ ‘리서치를 할 줄 아는 비리서처’가 늘고 있습니다. PM이 직접 간단한 사용자 인터뷰를 하고, 디자이너가 비구조화된 사용성 테스트를 진행하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리서처의 역할 축소가 아니라, 리서처가 직접 수행자에서 코치이자 품질 관리자로 진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3. 리서처에게 필요한 새로운 역량
커피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바리스타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달라진 것처럼, UX 리서처에게도 새로운 역량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첫째, 전문성의 깊이와 폭을 동시에 갖춰야 합니다. 정성 리서치만 할 줄 아는 리서처, 정량 분석만 하는 리서처보다는 두 가지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사람이 선호됩니다. ‘커피챗 인터뷰도 하고 GA4 퍼널 분석도 하는 사람’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습니다.
둘째, 인사이트를 조직에 확산시키는 능력입니다. 리서치 결과를 50페이지 리포트로 정리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10초 안에 핵심을 전달하는 슬랙 메시지, PM이 바로 활용할 수 있는 1-pager, 임원이 의사결정에 쓸 수 있는 프레이밍 — 이것이 시니어 리서처에게 기대되는 역량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도구나 방법론이 아니라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Learning to Learn)’입니다.
도구는 바뀌고, 방법론은 진화합니다. 그러나 사용자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새로운 것을 빠르게 습득하는 메타 역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레드버스백맨, 《UX 리서처의 일》
4.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다
UX 조직은 아직 여름입니다. 겨울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세분화는 성숙의 신호입니다. 커피 시장이 스페셜티로, 맥주 시장이 크래프트로 진화했듯이, UX 업계도 더 전문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15년에 쿠팡 한 곳뿐이던 UX 리서치 조직이 2022년에 10곳 이상으로 늘어난 것처럼, 이 흐름은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처럼 ‘아무나 UX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채용하던 시대는 끝났고, 자기만의 전문성과 관점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가 왔습니다.
당신이 확신할 때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업계에는 아직 여름이 한참 남아 있습니다.
Key Takeaways
커피숍을 떠올려보세요. 아메리카노 하나만 팔던 시절에서 산미 선택, 귀리 우유, 디카페인까지 — 선택지가 늘어난 건 시장이 죽은 게 아니라 성숙한 겁니다. UX 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군이 쪼개지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 겨울이 아니라 여름의 시작입니다.
Q. UX 리서처가 되고 싶은데 지금 시장이 어렵지 않나요?
A. 시니어 포지션은 회복 중이고, 주니어는 경쟁이 치열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성+정량을 넘나드는 역량, 인사이트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갖춘다면 기회는 분명히 있습니다. 중요한 건 ‘리서처 포지션’에 집착하기보다, 어떤 조직에서든 리서치 관점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이 글에 영감을 준 책

UX 리서처라는 직업의 일상과 성장, 그리고 조직 안에서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