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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시즌5, 세 번째 모임을 마치고 – 안티클라이막스와 지속가능한 불완전함에 대하여

6월 6일(금) 저녁엔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5 세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되는 멤버들끼리 먼저 모여 트레바리 강남 아지트 504호에 모여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쿠키와 과자, 케이크와 닭강정, 크로플과 사케가 들어간 초콜릿까지. 생일파티 같은 시작이었습니다. 한 달과 두 달 동안의 근황을 나누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고 지적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갑작스러운 일정으로 독후감을 제출하고도 모임에 함께 못한 멤버들께 안부를 전하며, 다음 모임에서 더 반갑게 인사드리겠습니다.

먼저 이 책의 제목에 관하여 하루키가 밝히고 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저자가 왜 이 책을 스스로 회고록이라고 밝히는지에 대한 생각도 담겨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원고를 완성하는데 10년 이상 걸린 책으로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스스로 연소하며 지속가능한 불완전함을 이야기하는 회고록에 가깝습니다.

나의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단편집 타이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책 제목의 원형으로 쓸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 준 테스 갤러거(Tes Gallagher) 부인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10년 이상 원고가 완성되기를 죽 기다려준 인내심 강한 편집자 오카 미도리 씨에게도 김이 감사하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후기 중에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REDBUSBAGMAN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5 세 번째 모임 단체사진
새로운 카메라 C530으로 내가 찍은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5 세 번째 모임 단체사진 ©REDBUSBAGMAN

모임에서 함께 나눈 지적 대화의 쿠키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1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1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2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2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3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밑줄 친 문장모음 03

1. 변화를 주려고 했던 발제문

하루키의 회고록을 읽고 발제문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는 것 같고 어딘지 평소보다 더 부족해보였습니다. 세계적 작가와 문학적 대가의 글을 읽고 스스로 초라해지는 기분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울트라마라톤을 뛰고 여름엔 트라이애슬론을, 겨울에는 어김 없이 풀코스 마라톤을. 포니테일을 자랑하는 하버드 학생들과 찰스 강변에서 달리며 이런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했지만 발제문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은 사실 이번 시즌을 시작하며서부터 마음을 먹었던 일이었습니다. 몇 가지 방향성을 두고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1. 처음에 만들어 둔 발제문 형식에 생각을 가두지 말 것
  2. 멤버들의 독후감에 대해서 스스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것
  3. 다른 멤버들의 독후감을 읽고 그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대화로 이어갈 것
  4. Book Talk는 4~5개 정도로 구성해서 멤버가 1, 2개를 골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 것

이번에 함께 읽은 하루키의 책은 5번째 시즌을 이어가며 스스로 계속 유지해야 할 것과 바꿔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했던 것들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책이라니. 대단한 작가이기는 합니다.

2. 안티클라이막스

하루키는 안티 클라이맥스(anticlimax)를 책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태희 님은 독후감에서 이 개념이 좋다고 했고, 민영 님은 그 생각을 북토크에서 물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록키>의 테마곡’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등을 지고 걸어갈 석양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천용 운동화처럼 소박한 결론이다. 그것을 안티 클라이맥스라고 사람들은 부를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프로듀서라면 영화화 기획을 제의해도 마지막 페이지만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결론이야말로 나라고 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228)

안티 클라이맥스 | 이야기나 사건에서 극적인 절정(클라이맥스)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쌓인 뒤, 그 기대와는 달리 예상보다 평범하거나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결말이 나는 상황이나 플롯 장치

혼자 고군분투해서 해냈지만 기대했던 결과 대신 평범하게 끝날 때. 대단한 절정으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어제 하던 대로 오늘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건 보통의 하루를 닮았습니다. 삶에서 그렇게 환상적인 일들이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힘을 너무 주고 준비한 것들을 해냈을 땐,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는 삶이 조금은 허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삶이란 그런 종류의 허탈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10km를 달렸어”, “내일도 10km를 달릴 수 있겠지” 정도로 반복하는 태도를 요하는 것 같아요.

3. 지속가능한 불완전함

얼마전 한 콘텐츠를 보는데 “‘게으른 완벽주의’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분이었습니다. 이건 완벽주의자가 아닌 게으른 사람이 하는 핑계거리에 불과하다는 설명이었죠. 너무 인간미 없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진짜 완벽주의자는 게으를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완벽주의가 나쁘지 않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안 하는 완벽주의이겠죠. 그래서 북토크에서 나눈 ‘완료주의’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일단 시작하는 것. 달리기를 완주한다고 할 때 보통은 1km를 페이스 5분으로 유지한다 등의 목표를 세우고 5km, 10km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완주라고 할 때 완은 완료한다는 뜻이니까 내가 세운 목표에 따라 완전히 끝까지 달리면 그것만으로 ‘완주’입니다. 지속가능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태도는 내가 결정한 달리기를 완료하도록 돕습니다.

  • 내가 정한 만큼 쉬지 않고 달린다
  •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달린다
  • 내가 정한 거리만큼 (쉬더라도) 달린다

4. 스트레스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 할루시네이션도 비슷하지 않을까?

최근 많은 조직들이 산출물을 필요한 구성원이 더 쉽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리파지토리(repository)에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AI Chatbot을 붙여서 메타 데이터를 형성하고, 내부에서 쌓은 로그 데이터를 붙여 UX 리서치 결과를 PO, 디자이너들이 쉽게 찾아보고 필요하면 그들의 행동데이터를 태블로 등을 통해 비교해 볼 수 있는 수준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달성하기 위해 AI Chatbot을 붙이는 순간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이걸 최소화하기 위해 Do not 가이드로 “000 하지 마” 등의 시스템 프롬프트를 입력하더라도 글쎄요. 리스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리서치 결과에 사실이 아닌, 그럴듯해 보이지만 검증된 적이 없는 오류들이 더해질 수 있다면 ‘리서치 결과의 대중화’를 지향했던 것이 무색해질 수 있습니다.

  • 리파지토리 (repository) | 라틴어 ‘repositorium’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 뜻은 ‘저장고’로 업계에서는 소스 코드, 기획서, 파일 등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중앙화된 디지털 저장소 혹은 데이터베이스, 아카이빙 시스템 등으로 쓰임
  •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 | ‘환각’이라는 뜻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거나 경험한 적 없는 것을 실제처럼 인식하거나 느끼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AI와 LLM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도구가 존재하지 않거나, 부정확한 내용을 진짜처럼 느끼게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합니다. 어원을 거스르면 라틴어 ‘alucinari에서 출발하는데 “마음속에서 방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I를 안 쓸 수 없고, 리파지토리에 대한 니즈를 거스를 수 없으니 스트레스를 없애는 대신 관리하는 마음으로 할루시네이션을 관리하고 계속 모니터링하는 일까지가 리서처와 리서치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에서 방황하는 대신 관리하면서 계속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도 합니다.

책과 함께 보면 좋은 콘텐츠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 모음

  • 야마구치 슈 – 일을 잘한다는 것
  • 데이비드 브룩스 – 사람을 안다는 것
  • 제현주 – 일하는 마음

내가 믿고 싶은 것을 계속 믿는 현상에 대하여

  • 내가 잘못된 개념을 알고 있으면 잘못된 개념을 검색하고 그 검색결과에 따른 콘텐츠를 학습하며 잘못된 개념에 대한 신념이 강화될 수 있습니다. Book Talk 3에서는 ‘무지의 자각’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 내가 지지 하는 후보의 공약을 다른 후보의 공약과 바꿔서 지지 여부를 묻더라도 여전히 지지하는 후보를 유지하는 현상(심지어 정반대의 공약을 묻더라도!)은 왜 나타날까?
    • 가설 1 | 공약 자체가 선거에서 후보를 지지하는데 영향을 거의 주지 않을 것이다
    • 가설 2 | 공약이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정체성’, ‘정당’, ‘이미지’ 등 다른 변수에 비하면 영향이 미미할 것이다
    • 가설 3 | 유권자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인해 후보 간 공약이 바뀐 것을 알더라도 여전히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 관련한 대표적 연구 | When Is A Pledge A Ple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년 10월(Vol. 52, Issue 4)
    • 미국, 영국, 덴마크 3개국에서 약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권자들은 공약이 바뀌거나(상대 후보의 공약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것이라고 제시되어도) 기존 지지 정당·후보를 바꾸지 않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논문에서는 유권자의 80% 이상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고 명시합니다.
    • In three conjoint experiments on representative samples totalling around 6,000 respondents in the United States, Britain and Denmark, we find remarkably consistent results… voters are not willing to hold their party accountable for a given statement—even if they consider it an election pledge.
When Is A Pledge A Pledge?
When Is A Pledge A Pledge?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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