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4, 마지막 모임을 가졌습니다. 16개월 동안 모임을 이어오면서 안국아지트에 처음으로 모였습니다. 시즌4를 시작하기 전, 우연히 팀 워크숍을 위해 안국아지트를 대관해서 이용했는데 모임방에서 바라보는 창경궁 풍경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남아지트는 정말 강남(역)을 닮은 분위기라면, 안국아지트는 고요하면서 묵직한 느낌이라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으로 포틀럭 파티처럼 1층 마트에서 원하는 음료, 술, 간식을 사 와서 먹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작은 변화였지만 조금씩 더 편안해질 수 있었기에 다음 시즌에서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어제 모임을 마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쉬움이 가라안지 않는 건 이번 시즌에 찰싹찰싹 애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시즌도 모임을 개설하겠다는 마음은 모임을 마친 후에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일상에 충실한 순간들로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면 또 평정심을 이내 찾곤 합니다. 이럴 땐 본능을 거슬러 금요일 저녁에 책을 함께 읽고, 멤버들의 독후감을 통해 책을 다시 읽고, 그중 기억할 만한 문장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꾸역꾸역 아지트까지 7시 전에 도착해 어찌어찌 11시 30분쯤 건물을 나올 때 “<리서치 하는데요> 시작하길 잘했다”라는 마음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다음 시즌을 오늘 13시에 공개 오픈했습니다. 지난 [별책부록] 모임에서 스튜디오오오이 방명록에 적어주셨던 멤버의 손글씨처럼, 뇌와 마음과 귀가 즐거운 모임은 들이는 것보다 얻어가는 것이 크다고 믿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자리가 아니면 함께 책을 읽고, UX(User eXperience)와 리서치, 일하는 마음에 대해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이야기 나눌 자리가 마땅히 없기도 했습니다. 대체재가 없었기에 <리서치 하는데요> 모임을 더 경쟁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트너 민영 님께서 모임 전에 시즌4 마지막 모임에선 이번 시즌에서 함께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과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해 주셨는데요. 마지막 모임에서만 할 수 있는 시작이었고 덕분에 오손도손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은 4권이었습니다. (민영 님, 감사합니다)
- 1회차 | 생각노트, 『디테일의 발견』
- 2회차 | 제럴드 M. 와인버그, 『대체 뭐가 문제야』
- 3회차 | 제현주, 『일하는 마음』
- 4회차 |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이너 마음으로 걷다』
각자 꼽은 책들마다 그러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3번째 책으로 함께 읽었던 제현주 님의 『일하는 마음』은 리서치하는 마음, 리서치를 하면서 어려운 마음을 함께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가 그러했듯 몇몇 멤버들은 소중한 동료에게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책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각자 벽에 부딪혔을 때 그 벽을 맞대어 모서리를 만들고 하나를 위에 더 쌓아 함께 그 벽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이 책을 꼽은 동현 님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2번째 책으로 함께 읽은 『대체 뭐가 문제야』는 리서치하는 분들께 제가 항상 필독을 추천하는 책이었는데요. ‘문제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리서치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본질과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미국식 유머로 가득 찬 책입니다. 번역이 조금만 더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면 이 책은 지금보다 훨씬 유명해졌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고 개선할 때, 문제를 진단할 때 쉽게 빠질만한 함정과 리서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발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곁에 두고 꺼내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꼽은 책은 생각노트, 『디테일의 발견』이었고 고백하건대 개인적인 팬심이 담긴 도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저자인 생각노트님께서 <리서치 하는데요> 시즌4 멤버들을 위한 여는 글을 건네주셔서 책에 담긴 생각을 편지글처럼 함께 읽고 시작할 수 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무엇을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관찰의 폭과 기록의 쓰임이 귀감이 되는 콘텐츠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임에서 함께 나누고 싶었던 불씨와 마음
1. 마음이 담긴 일을 하려면, 먼저 내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
좋은 경험을 만든다는 것은, 사용자가 더 쉽게 쓰고 유용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고민하고 실행한 결과이며 운영을 통해 그걸 개선해 가고 지켜온 대가입니다. 그냥 되는 것은 요행이고 계속 잘 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움이 되겠다는 다짐”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혜민 님의 독후감에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 북토크에서 이야기했던 “일상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사소하더라도 좋은 변화를 만들겠다는” 디자이너로서의 마음을 인상 깊게 듣고 적어두었습니다.
2. 자기만의 언어로 담백하게 말하기
(와인을 마신 탓인지) 평소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고치고 싶었던 제 모습 중 하나는 호불호가 명확해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쉽게 티를 낸다는 것이었는데요. 과거 리서치 조직에서 일할 때 제가 존경하기 어려웠던 분을 보면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에피소드를 공유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로, 어떤 리서치를 하더라도 모든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리서치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만난 사용자가 모든 사용자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틀릴 수 있다”라는 열린 태도가 필요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리서치하는 태도까지 리서치하는 실력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만의 언어로 담백하게 말하려면 ‘실력’은 물론 ‘태도’까지 갖춰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험기간에 틀린 문제를 물어봤을 때 가장 쉽게 설명했던 친구는 문제의 정답이 무엇인지만 알아서는 안 되고, 그 원리와 응용 그리고 친구가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이해하려는 태도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3. 저기요, 이럴거면 왜 UT를 해요?
테크 조직 소속으로 PO, 데이터 분석가, UX팀, 마케팅팀 등 여러 조직이 함께 프로덕트를 만들 때였습니다. 새로운 기능을 출시해야 하는 타임라인은 언제나처럼 정해져있었습니다. 목표를 정할 때 으레 그러하듯 분기별 수치를 찍어두고 그걸 달성하기 위한 기능출시 시점도 정해두니 어떠한 프로덕트에도 그럴듯한 계획은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능을 출시하려고 할 때, 관습적 디자인을 활용할 수 없다면 예상하지 못한 사용자 경험의 문제가 발견되기 마련이고 이걸 검증하기 위해 UT(Usability Testing)을 진행합니다. 문제는 이 UT가 1번 또는 2번이면 마칠 것이라는 희망찬 시나리오에 따라 계획을 세워두기 때문에 사용성 문제가 여러개 발견되거나,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제안한 솔루션이 또 다른 사용성 문제를 일으키면 계획이 꼬여버립니다. 정해진 배포시점에 기능을 출시하기 어렵다는 불편한 이야기를 리더십에 꺼내야 하는데 많은 경우 듣기 싫은 소리를 용기내서 하지 못하고 그래서 문제가 더 커지거나, 신뢰관계가 흐트러집니다.
함께 일하던 동료는 제게 “이거 또 디자인 수정해서 출시하면 목표달성은 보장하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고 “사용성 문제를 해결했다고 이 제품이 사랑받을 거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용성 문제를 해결한 상태로 제품을 출시해서 사랑받을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때 쓴 글도 소개합니다. 바로가기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기 전에 영국프리미어리그 등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시즌 중에 소집해서 해외파와 국내파 선수들로 스쿼드를 짜 평가전을 치르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평가전 이긴다고 본선에서 좋은 성과를 낼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보통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핵심은 본선에서 잘 하려고 하는 겁니다. 잘 하려는 마음은 같습니다. 모의고사를 보는 이유는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모의고사를 잘 봤다고 수능을 잘 볼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수능은 1번의 기회이고 실패할 확률을 줄여야 하니, 실제 환경과 아주 유사한 형태로 평가전이나 모의고사를 치르면서 실전 감각을 키우는 겁니다.
멤버들과 토론을 하면서 기억하고 싶었던 표현
1. 찰싹찰싹 하자 치덕치덕 말고
- 유난한 도전을 이어가는 토스의 2월 말 프로모션 ‘꽃돼지 저금통’ 이벤트가 북토크 중 주제로 다뤄졌습니다. 전 국민을 다단계화하는 비즈니스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고 언론보도까지 이어졌죠. ‘만보기’로 남녀노소 대중으로부터 트래픽이라는 핵심 지표를 달성한 토스는 여러가지 시도를 이어왔습니다.
- ‘꽃돼지 저금통’은 내가 2천원을 넣고 링크로 친구에게 공유하면 4천원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설명이 되어 있어 매칭그랜트 방식으로 토스가 2천원을 더 넣어 4천원으로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링크를 공유하면, 2천원을 입금하도록 유도합니다. 공유한 친구에게 송금해서 4천원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삥뜯는다’라는 오해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벤트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무려 600만명이 참여했고 토론에서도 다뤄질 만큼 각인된 행사였죠. 사용자들은 ‘저금통’을 채워 포인트를 받으려고 했고, 이를 위해 카카오톡은 물론 트위터(X), 당근, 네이버 카페 등 모든 채널을 활용했습니다. 확산을 위해 토스는 한 명의 이용자가 다른 사람의 저금통을 채워줄 수 있는 횟수를 3회로 제한했는데, 저금통을 채우려면 최소 10명, 많게는 20명 정도의 인원이 내 저금통을 채워야 했습니다. 저금통을 채우는 기준도 불명확하니 “일단 공유하고 보자”라며 여기저기 꽃돼지들이 날아다녔습니다.
- “이제는 삥도 뜯네?”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그럴듯 해보이는 건 왜 그럴까요? 유난한 도전을 이어가는 토스를 보면 양가적인 감정이 듭니다. 참 빠르다, 참 잘한다. 그러면서도 “이건 좀 심한데”라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기만적 패턴, 늘어나는 광고. 토스가 슈퍼앱을 지향하면서 생긴 많은 변화들은 사용자 경험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방적이거나, 기습적이거나, 불친절했습니다. 만보기에서 복권을 통해 광고를 봐야만 리워드를 받게 하는 방식이나, 유료 요금제의 혜택이 갑자기 축소되는 것,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상금을 걸어두고 트래픽을 모으는 방식들까지. 테크핀 업계를 넘어 테크 업계에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기업답게 책임감도 유난했으면 좋겠습니다.
- 토론에서 멤버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가오카 겐메이가 이야기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가게, 절묘하게 좋은 멋을 풍기는 것, 균형이 있는 것과 잘 됐으면 하는 마음들이 ‘찰싹찰싹’이라면 ‘꽃돼지 저금통’은 뭐랄까, 좀 치덕치덕스럽다. 어떤 선은 넘을 수 있어도 그것을 넘지 않는 이유가 충분하고 그것이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더라도 넘지 않는 편이 전체적으로는 사용자와 업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은 아닐까요?
2. 관찰하고 묻는 이의 여유가 엮는 공감
- 사용자에게 관대하고 여유를 갖는 리서치 태도는 어디에서 올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두고 Book Talk 2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관대한 마음, 여유를 가지고 사용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에서 처한 리서치와는 거리가 있지만 적어도 방향성은 고려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 저는 이 태도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회의에서 월급을 받고 이 시간 리서처로서 사용자를 만나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수세적 태도를 넘어 “내가 이 리서치를 통해 지금 만들고 있는 제품에,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을 때 이 관대함과 여유가 생겼던 것 같았거든요. 동시에 인터뷰이도 그 마음을 느껴서 “내가 리워드를 받고 이 시간 리서치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 이 제품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라며 솔직함과 선의로 인터뷰에 응해줄 때, 공감이 파인딩으로, 파인딩은 인사이트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 돌이켜보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마음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그게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그게 내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나와 내가 하는 일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개인의 작은 다짐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 이쯤에서 치덕치덕 거리는 것 같지만, 매번 트레바리 <리서치 하는데요> 모임을 마치고 24시간 내에 회고를 적어 멤버들에게 공유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기엔 부족했던 시간과 진행을 수습하고 모임에 나오지 못한 멤버들에게 혼자서라도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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