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광역버스에 백팩을 메고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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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대나무

벌레 먹은 밤을 보면, 에이, 벌레 먹었네~ 하고 버릴 텐데,
'가을 달빛 속에 / 벌레 한 마리 / 소리 없이 밤을 갉아먹는다.' 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어이구 추워~를 연발하는데,
'한밤중에 내리는 서리 / 허수아비 옷을 / 빌려 입어야겠네.' 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첫눈인데,
'작년에 우리 둘이 / 바라보던 그 눈은 / 올해도 내렸는가?' 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일본의 시인 바쇼*가 쓴 한 줄짜리 시들입니다.
그는 평생 이런 철학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한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서는 대나무한테 배우라."

너무 당연한 말이라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숩니다.
소나무한테 가서 대나무에 대해서 묻고
대나무한테 가서 소나무에 대해 묻고
이래서야 제대로 된 답을 들을 리 엇습니다.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없어섭니다.
상대방이 나를 속여서라기보다 스스로에게 속아섭니다.
속이지 맙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바로, 나 자신을.
12년 전에 쓴 라디오 방송 코너 원고다. 방송이 끝나고 DJ가 내게 푸념했다.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한테 배우고 대나무에 대해서는 대나무한테 배우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
방송작가로 일한 26년 동안 가장 당황한 순간을 꼽으라면 이때다. 진행자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원고를 그대로 읽는다면 직업윤리에 어긋난다. 앵무새가 되는 것이다. 청취자들은 진행자가 알고 하는 말인지 아는 체하는 말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라디오는 귀로만 듣기에 더 육감적이다.
세상의 모든 아는 체하고 하는 말은 거짓이다. 거짓의 맹점은 끝내 일관성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있다. 언젠가는 자가당착에 빠져 망신당한다. 방송작가는 이런 상황을 방지해야 하는 최전선에 있다. 진행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비록 낯선 내용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하고 원고를 써야 한다.
앞서의 원고는 어려운 낱말이 없어 쉬운 거 같아도 읽기 쉽지 않다. 전문 방송인의 발음과 호흡을 염두에 두고 쓴 터라 비전문방송인이 운율 - 문단에 따라 속도를 빠르게 느리고, 쉬어가고 맺어가고 등 - 을 무시한 채 읽으면 영 어색하다. 문학을 전공하고 언론사 시험을 통과한 아나운서라는 믿음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혹시 몰라 누구라도 이해할 법한 해석을 말미에 보탰다. 그런데도 눈 동그랗게 뜨고 토로한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글에 말을 보태야 한다면 실패한 원고다. 내 원고는 이미 실패했다. 그래도 의도는 설명해야겠다 싶어 무엇이 이해되지 않느냐 물었다. 그가 잔뜩 억울해하며 성토했다. "왜 나무한테 배우냐고요. 대나무! 소나무! 나무가 말해? 이상하잖아요!" 맙소사! 난 되우(아주 몹시, 되게, 된통.) 놀라 할 말을 일었다.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PD가 냅다 일갈했다. "의인화라고, 의인화! 의인화 몰라? 너는 어렸을 때 동화책도 안 읽었냐?"
그때 알았다. 세상에는 나무가 말하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무가 말하면 이상한 일이라 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고 보니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낸 옛일이 떠오른다. 중학생이 되도록 일요일 아침마다 TV에서 하는 디즈니 만화 시청하는 게 낙이었다.
좋은 건 나누고 싶은 법이다. 그런데 친구는 디즈니 만화를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다 했다. "동물이 사람처럼 말하는 게 징그럽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톰과 제리, 미키와 미니, 도널드, 푸우는 동물이 아니라 반박하자 친구가 "동물이 아니면 뭐냐?"라고 했다. 나는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우리만 확인했다.
지금 같으면 동물이 아니라 의인화한 캐릭터라고 할 텐데 그렇게 말해도 "어쨌든 생김새가 고양이, 쥐, 오리, 곰 아니냐?"라고 따져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의인화라고, 의인화! 의인화 몰라? 너는 어렸을 때 동화책도 안 읽었냐?"라고 빼액 소리라도 질러야 하나.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친구와는 스스러운(서로 사귀는 정분이 두텁지 않아 조심스럽다) 사이가 돼버렸다.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없는 사람'은 나였다. 소나무한테 소나무 말을 하고 대나무한테 대나무 말을 해야 하는데 소나문지, 대나문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아예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당연히 알겠거니 겉잡았다. 상대가 속여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속아 저지른 실수였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 하나. '나무가 말을 한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면 '나무'와 '말'이 어떤 뜻이냐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실제로 낱말은 배우고 외워야 한다. 또 '말은 한다'라고 하지, '말이 한다'라거나 '한다 말을'이라고 하지 않는 등의 문법과 형식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이 또한 물리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러나 '나무가 말을 한다.'는 문장이 어떻게 뜻을 가질 수 있느냐 묻는다면 이에 대해 가르칠 수 없고 배울 수 없다. 이는 언어적 직관으로 스스로 획득(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획득'이라는 어휘를 '내가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적 직관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적 상상력, 은유, 함축, 의인화 운운해봐야 난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언어적 직관이 통한다는 의미다.
마쓰오 바쇼*는 일본 하이쿠의 명인으로 꼽히는 방랑 시인으로 해학이 전부이던 하이쿠에 품격을 높이고 높은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낸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

Source: 유선경, 『어른의 어휘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