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광역버스에 백팩을 메고 탑니다
dark mode light mode NEWSLETTER

삶이 없이 삽니다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말했죠.
네 장점은 호기심이 많다는 거야.

처음엔 왜 장점인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를 알았죠.
일을 하는 동력이 내부에 있는 겁니다.

주변에 많은 사물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뇌구조상 불가능한 멀티태스킹을 해야만 합니다.
갖고 싶고 쓰고 싶은 물건이 많아 소비하는 것이 많은 사람.

올 여름, 핀란드 헬싱키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호기심을 핑계로 많은 물건을 캐리어에 담았지요.
아라비아, 이딸라, 피스카스 빈티지 컬렉션은 제게 매력적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수화물 무게’가 걱정이었죠.

교재를 우편으로 한국에 보낸다는 친구 이야기에 우체국을 찾았습니다.
맥북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 다음날이었죠.

한국에 도착해서 오랜 친구였던 맥북을 몇 차례 쓰지 못했습니다.
수명을 다한 탓인지, 항공우편 속에서 물리적인 스트레스가 수명을 다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심폐소생술을 한다는 마음으로
1차 분해를 하고 기본적인 기능을 점검했지만 역부족이었죠.

2011 맥북 프로 해체 ©이승준

2011년부터 업그레이드를 해가며 계속 쓰던 물건이었습니다.
희한하게 물건을 많이 사고 쓰면서도, 오래된 물건에는 애착이 있습니다.

고치려고 애플 전문수리가게를 알아보던 중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 서강잡스 “

제가 좋아하는 퍼블리 박소령 대표가 기사를 추천했던 기억이 났죠.
서강이고 잡스면, 저도 좋아하는 교집합이니 연락을 취했습니다.
테헤란로에 있는 수리점에서는 “그냥 새로 하나 사시죠”라며
제 마음을 몰라줬기 때문에 전 “서강잡스” 존재가 더 기뻤죠.

그는 분명 오래 쓴 기계에 담긴 내 마음을 이해할거야
내 마음을 알아줄거야.

여기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2017년 8월 31일 서강잡스에 도착한 제 맥북은
사연만 늘어 고장난 상태 그래도 10월 12일에 제게 도착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요?
오늘 Daily Report 제목 “삶이 없이 사네요”는
서강잡스, 김학민 대표가 보낸 메시지 일부 내용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페이스북 메신저로 서강잡스에 고장증상을 촬영하여 전송
2. 수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택배로 맥북 발송 (2017년 8월 31일, 서강잡스 도착)
3. 견적을 요청했으나 일이 많아 시간이 필요하다며 (2주 경과)
4. 메인보드 문제로 보이나 다른 곳도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추가확인 필요 (2주 경과)
5. 중간에 진척을 확인했으나 “결혼식에 와서 바쁘다”, “일이 많다” 등 답변으로 2주 경과
6. 서강잡스를 통한 수리를 포기하고 고장난 맥북을 돌려받기로 요청 (9월 25일)
7. 29일, 맥북을 발송했으나 오배송으로 다른 고객 노트북이 도착 (9월 30일)
8. 김학민 대표 측에서 전화, 메시지, 카톡으로 노트북 바뀐 사실 확인요청 (10월 6일)
9. 다른 고객이 보낸 노트북 확인했으나 “맥세이프 충전기” 서강잡스 출고누락 확인 (10월 12일)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수리할 수 있다고 했던 기계는 43일이 지나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던 서강잡스는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바뀐 노트북을 찾으려 할 때에서야 카카오톡 친구추가까지 하는 적극성을 보였죠.

[ 꼭 고쳐야 하는 것 ]

기계고장은 원인을 찾기 어려우니 그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장났다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있죠.

언론은 일찍부터 서강잡스를 주목했습니다.
애플을 사랑하는 탈북자, 서강대를 다니며 서강대 앞에서 기계를 잘 수리해주는 사람.

대표가 탈북자라는 사실,
일찍이 김일성 시계를 고쳤다는 사실,
서강대를 다니며 서강대 앞에서 가게를 운영한다는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브 잡스 사진을 걸어두고 기계를 고치는 모습.

사실과 모습이 겹쳐지면 이야기가 나오고, 솜사탕처럼 키우기 좋죠.
한줌의 하얀 가루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면 달콤한 동심이 일어나니까요.

김학민 대표는 제게 사과문자를 보냈습니다.

“네 제가 요즘 바빠서 삶이 없이 삽니다.”

삶이 없이 산다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인이 “삶이 없이 산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헤치면 안 됩니다.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본인이 필요할 땐 적극적인 삶이었고, 필요하지 않으면 외면하면 되는 삶이었죠.

그곳에는 기술만 있습니다.
아이폰을 대하며 아픈 곳을 고치는 기술만 있습니다.

그곳엔 일관성은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며 불편함을 헤아리는 삶은 없었습니다.

생각해봤습니다.
그 이유가 무얼까?
무엇이 그를 그리 바쁘게 해서,
사는데 삶이 없게 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를 찾은 다른 사람의 삶을 헤치게 할까 싶었습니다.

[ 언론 속성 ]

언론은 찾아야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기사를 써야하고
기사를 쓸 아이템을 찾아야만 하니까
직접 써보고 비교해보며 자신의 경험을 쓰지 않죠.

보여지고 들리는 것과
쓰여졌을 때 잘 퍼져나갈 것을 찾는 겁니다.

서강잡스는 작고 실력있는 가게였을테죠.
소신을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멋진 청년의 가게.

언론을 통해 소문이 나자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졌고
그는 직원을 고용하고 사업을 키웠습니다.

언론의 속성이 스며가면서 서강잡스는 달라졌고
고장난 맥북이 고쳐지지 않았듯 신뢰는 다시 켜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