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갑자기 일본 만화 열풍이 불었다. 오전에는 아내가 『파인애플 아미』라는 연작 만화를 빌려와 식탁 위에 시루떡처럼 쌓아놓고 읽기 시작하더니, 저녁에는 딸아이가 『미스터 초밥왕』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나는 이 아까운 시간에 왜 그따위 것을 읽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두 여자가 하도 열심히여서 이쪽저쪽을 들여다보게 된다. 끝내는 내가 더 깊이 빠져서 순서를 지키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면서 두 만화 전체를 다 읽고 말았다.
『파인애플 아미』는 냉전시대가 배경이니 원작과 한국어판이 모두 꽤 오래전에 발간된 만화 같다. 프랑스의 외인부대에 근무한 적이 있는 일본계 미국인인 한 젊은이가 유럽에서 자기 방어 훈련 프로그램의 교관 노릇을 하며 갖가지 국제적인 사건에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다. 세련된 그림에 구성도 탄탄하고 대화도 훌륭하다. 제2차 대전 이후 동서의 역사를 꿰뚫어 알고 있으며, 외교 정치 금융에 관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내막들을 알려준다. 여러 집단들의 테러 조직이나 각국의 첩보기관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정보를 누리고 있다. 포도주에 관한 지식만 해도 포도주 사전 한 권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며, 파리나 베를린의 골목길 하나하나에도 소홀함이 없다. 장르로 보자면 스파이물에 해당하는데, 구체적이고 소상한 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어 같은 부류의 영화나 소설처럼 허황하지 않으며, 미학적으로도 온갖 상투적인 기대를 벗어나 그 나름의 경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미스터 초밥왕』이다. 이 장편만화도 한국어판 초판이 수년 전에 발간되었으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같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일본 어느 바닷가 소도시의 초밥집이 거대 자본의 초밥 체인점에 밀려 가게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자 그 집의 중학생 아들이 도쿄의 유명 초밥집에 유학하여 갖은 기술을 연마한 끝에 일본 최고의 요리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놀랍다는 것은 초밥 만드는 이야기 하나로 30여 권에 이르는 장편만화를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밥은 어떤 쌀을 어떻게 구입하여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 거기에 소금과 초 따위를 어떤 비율로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초밥의 재료가 되는 생선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물 좋은 생선을 알아내고 구입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칼질은 어떻게 하며, 재료는 익혀야 할지 날것으로 써야 할지, 맛 내기를 위한 양념으로는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간장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그 용처가 무엇인지, 한 사람의 초밥 요리사가 알아야 할 지식과 연마야 할 기술은 아무리 열거해도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줄거리가 탄탄한 편은 아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일본식 장인정신에 대한 과장도 있고, 일본 요리의 대표적 메뉴인 초밥을 신비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초밥을 만드는 과정만 가지고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에 못지않은 긴장감과 흥미를 내내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소홀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깊고 섬세하고, 높은 긍지를 지닌 문화적 터전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를 보고 나서 내가 받는 저녁 밥상은 음식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다른 생각도 든다. 음식 하나를 만드는 데에 알아야 할 것 주의해야 할 것 연마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밥 한술 나물 한 젓가락을 먹을 때도 유념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다는 말이 된다. 만드는 기술 못지않게 먹는 기술이 필요하다. 아니, 먹는 정성이 곧 만드는 정성이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느끼려는 자에게 맛은 도처에 있다. 게다가 이것은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2003)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