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광역버스에 백팩을 메고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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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의 밤

네 번째 퇴사를 했습니다. 회사가 이름을 바꾸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타워팰리스 풍경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잠시나마 스타트업에 머물렀다는 걸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봤습니다. 2011년 전역과 함께 일을 시작했으니 올해 일을 한지 딱 10년입니다. 요즘은 얼굴 보는 자리가 조심스러워 그래도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이직 소식을 텍스트로나마 전했습니다. 반응은 지난 퇴사와 비슷했습니다.

10년 동안 5번, 마지막 직무 이름은 Autonomous Service Architect ©RBBM
  1. 어디로 가요?
  2. 이직왕이다! 그 정도면 취미 아니에요?
  3. 고생했어요!
  4. 응원해요!

사람의 반응은 택 1이 아니라 2를 먼저 말하고 1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4번을 말하고 1번을 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진짜 트랜스포머네“라고 말해 준 첫 직장 사수였습니다. 제가 일을 하다 막히는 게 있으면 속으로 ‘사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는데 4번 이후에 따라온 반응이 내심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트랜스포머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다녔던 회사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업계가 워낙 유망하기도 하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상황에서 포티투닷만큼 HW, SW, 플랫폼을 모두 다루는 기업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제가 협업하는 동료 중 자율주행에 필요한 기술을 만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있었고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처음 받은 스톡옵션은 손에 쥐어지기도 전에 포기했지만, 회사가 상장한다면 저는 주식을 사서 주주가 될 생각입니다.

제가 회사를 그만둔 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10년 동안 일을 했으니 뾰족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 손에는 여러 물건이 있는데 맥가이버칼 같아서 다 될 것 같은데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긴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을 계속해나갈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은 자기 효능감과 직결돼서 상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로 이어집니다. “내가 여기서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가?” 이런 자기 의심의 결론이 ‘트랜스포머’로 이어졌습니다.

마음은 편안합니다. 다섯 번의 직장을 다니는 지난 10년 동안 그만둔다고 했을 때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될까요?”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평균보다 나은 평가도 받았고 지난 5년 동안에는 매달 TREND REPORT라는 이름으로 제가 관심 있게 본 소식들을 마음대로 보내기를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퇴사를 밝힌 후에는 나를 진심으로 괜찮게 생각했던 괜찮은 사람들과 더 많이, 자주 이야기했고 그걸로 괜찮습니다. 퇴사하는 마지막 날에는 회사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 부분을 HR 미팅에서 솔직하게 말했고 동료들과 인사도 나눴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괜찮지 않은 건 점점 더 엉덩이가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치열하게 일하고 미련 없이 바꾸는 데 주저함이 생길 것 같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습니다.

이직이 어려운 건 이직의 과정에서 과제, 인터뷰, 처우 협의에 드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역할을 기대만큼 잘 해내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물어가면서, 신중하되 흔쾌한 모습으로 해내는 것은 내비게이션 없이 초행길을 가는 여정과 닮았습니다. 다행인 건 그 여정을 다시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몸과 마음, 여정에서 벌어진 즐거운 에피소드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낡고 오래된 내연기관 차를 타면서도 포티투닷이 만들 변화를 손 내밀면 닿는 거리에서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