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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을 보면 속을 짐작할 수 없다

'겉볼안'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겉을 보면 속을 알아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명사로 줄임말이다. 신조어 같지만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표제어이다. 경험치가 늘면 겉볼안이 맞을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겉볼안이 다 맞았다고 다음에 맞힐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다 틀렸다고 다음에도 틀릴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도박사의 오류 - 확률에서는 앞 사건의 결과와 뒤 사건의 결과가 서로 독립적이다. 도박사의 오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줄곧 잃기만 했으니 다음엔 꼭 딸 거라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기고 질 확률은 언제나 50:50이다.)
크리스타 매콜리프 ©Google Art and Culture
마흔 넘으면 얼굴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는 말도 믿지 말자.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많다. 웃음 머금은 선한 인상이지만 굴퉁이(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은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 사람)거나 망종(아주 몹쓸 종자라는 뜻으로 행실이 아주 못된 사람을 이르는 말)인 자도 있고 무뚝뚝하고 까끄름한(편안하지 못하고 불편한 데가 있다)인상으로 보여도 칠칠하고 다정한 이들이 적지 않다. 아버지는 사기꾼치고 인상 나쁜 사람 없다고 하셨다. "인상이 험악하면 사람들이 속겠냐? 인상이 좋으니까 사람들이 끔뻑 속지!" 하시면서 하기는 '사이비'라는 말도 진짜같이 보여도 가짜라는 뜻 아닌가.
그래도 많은 사람이 말보다 인상을 더 신뢰하는 듯 보인다. '생긴 대로 논다'고 했다 '겉만 보고 모른다' 했다 오락가락한다. 뜻은 반대지만 인상과 외모를 일정한 범주에 집어넣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나는 표정이나 인상을 이목구비처럼 외모의 일부로 볼 뿐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않으려 한다. 보여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AP 통신에서 폭발 이후 사진이라고 보도했던 크리스타 매콜리프 가족 사진 ©경향신문
이런 태도를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 1986년 1월 28일 11시 38분에 발사한 우주왕복선 첼린저호 폭발사고 때문이다. 미국에서 우주선 쏘아올린다고 하면 덩달아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설렌 시절이었다. 더구나 챌린저호는 발사장면을 세계에 TV 생중계한 최초의 우주선이었다. 7명 우주비행사들 중 크리스타 매콜리프가 연일 화제였다. 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우주비행 사상 비전문인으로 두 번째, 여성으로서 최초였다. 그를 보며 전 세계 많은 이들이 평범한 사람도 머잖은 미래에 우주여행 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73초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챌린저호는 발사 73초 만에 1만 4,020미터 상공에서 공중폭발하고 말았다.
처음에 나는, 우주선은 원래 저렇게 요란하게 지구를 떠나는가 보다 건너짚었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우주 쇼가 펼쳐지는 걸로 착각한 이들이 많았고 파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경악했다고 한다. 이튿날 조간신문에 일제히 관련기사가 1면에 실렸다.
여러 컷의 보도사진 중 유독 내 눈길을 붙잡는 한 장이 있었다. 크리스타 매콜리프 가족의 사진이었다. 젊은 여성이 불에 덴 듯 울음을 터트리고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애타게 상공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멍한 얼굴로 울고 있는 젊은 여성의 손을 잡고 있다. AP통신이 현장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매콜리프 가족이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뇌리에 박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반년 후 정정기사가 실렸다. 사진이 챌린저호 발사 73초 후에 찍혔다는 것이다. 즉, 폭발 직후가 아니라 폭발 직전에 찍힌 것으로 가족이 지은 표정은 '충격'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감격'에 겨워서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폭발 직전과 직후는 극과 극으로 다른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이 한 장의 사진에 들어 있는 세 사람의 표정은 우주선 발사 직후의 감격이라 해도 폭발 직후의 오열과 충격이라 해도 말이 된다.
이 오보를 계기로 나는 사람의 표정에서 생각과 감정을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표정을 읽는다는 게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의 투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여겨서다. 특히 어른이 가진 표정의 대부분은 언어와 더불어 대표적인 학습화와 사회하의 소산이다. 피카소와 고갱, 클레 등 서구의 내로라하는 미술가들이 유별나게 원시 부족미노가 어린이, 정신질환자를 주목한 것은 인간의 외양에서 인위를 벗겨낸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Source: 유선경, 『어른의 어휘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