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해야 산 하나 넘어 이사를 하고서도, 늘 마음 한 편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한량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지나치길 두려워 한 적은 있어도, 언제나 마음의 지표는 변하지 않았다.
동네의 모양이 칸칸이 자잘한 것은, 그 옛날 북촌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단위로 마을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가회동이나 계동에 비해 모양이 얇고 길쭉한 것은, 옆에 범접할 수 없는 창덕궁이 자리잡은 까닭이다. 그 길다란 동을, 나는 종로구의 칠레라 불렀다. 원서동. 창덕궁 후원의 서쪽 동네. 길을 걷나 만나는 벽돌집에 기와를 얹은 카페는, 조선 최초의 복싱장이며, 별 생각 없이 걷다가 마주치는 비석은 역사책 속 인물들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곳. 그리고 웃음기 하나 없이, 마을버스의 정류장 안내 방송에 빨래터가 등장하는 동네. 청와대가 멀지 않은 까닭에, 일정고도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자리 잡은 한옥은 허물 수 없는 동네.
유일하게 진행되는 공사는, 무려 조선 시대의 자취를 되찾고자 종묘와 창덕궁을 잇는 공사뿐인 곳. 우리는 그곳에 사는 동안, 동네 토박이 할아버지와 아는 체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는데, 약간의 시차를 두고 흘러나오는 할아버지의 지난 이력엔 어김없는 자랑이 스며 있었다. 내가 옛날에 무슨 학교를 나왔고, 어디를 다녀오고, 여기까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외할아버지가 창덕궁 경비 대장이었어.”, 여기에 이르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건 뭐 어디 갖다 붙일 수도 없는 자랑인 것을. 우리 외할아버지 눈 감아, 하면 이미 눈 감으신 지 오래인 것을. 그런 무수한 날들을 거쳐, 우리는 원서동에 집을 사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의 낙관론이 기지개를 폈다. 마음은 벌써 북촌 마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