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핀 목련이 어김없이 봄을 알립니다. 목련은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화사하게 피어나지만, 그 끝은 유독 처연합니다. 꽃잎이 한 번에 툭 떨어지거나 시들 때 갈색으로 얼룩지는 그 모습은, 찬란한 정점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상실감을 닮았습니다. 잔인한 봄의 풍경 위로 황무지가 겹쳐집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시켜 주었기에.
T.S. 엘리엇, <황무지(The Waste Land)>
엘리엇은 왜 봄을 잔인하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강요된 생명력’ 때문입니다. 겨울은 모든 것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 없는 망각과 안식의 계절이지만, 봄은 죽어 있던 땅에서 억지로 생명을 끌어내야 합니다. 잠든 뿌리를 깨워 꽃을 피우는 과정 자체가 고통이라는 역설입니다. 또한 봄은 잊고 싶었던 기억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일깨웁니다. 생명력 넘치는 주변 풍경과 달리, 내면이 황폐한 인간에게 그 활기찬 기운은 오히려 지독한 괴리감을 줍니다.
나의 3월이 그러했습니다. 2월 한 달을 안식월로 보내고 복귀한 3월은 가장 외로운 봄이었습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흔한 인사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열과 기침으로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이어지며 몸과 마음이 깎여 나갔습니다. 결국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대에 결절이 생긴 줄도 모르고 감기약만 먹으며 보낸 시간이 바보 같았습니다. 가수가 아니더라도 기침을 하며 목을 계속 사용하면 결절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내 방의 창문이 점점 벽으로 바뀌는 듯한 단절감이 밀려왔습니다.
이 봄에 자주 듣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소라 6집의 ‘봄’. 담담하게만 들리던 그 노래가 이번 봄에는 처음으로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올해로 또 한 살이 느네요”라는 가사가 마음을 찔렀습니다. 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던 ‘봄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다니요. 배워서 아는 것이 스스로 깨닫는 경험이 되기까지는 이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중요한 보고 자리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준비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받아도 답하지 못한 채 침묵해야 했던 고독하고 잔인한 날들. AI가 나의 쓸모를 대체하기 전에 기술을 익히겠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내 곁에는 아침·점심·저녁이 적힌 알약 봉투들만 보석처럼 예쁜 색깔을 뽐내며 놓여 있었습니다. AI는 감기에서 나를 빨리 낫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펐습니다.
하루를 작은 큐브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 고립이 편안해질 때쯤 다시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통화와 보고처럼 말이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밀려올 때마다, 나의 존재 가치가 구멍 난 풍선처럼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책을 꺼내 속으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낸 소리는 끝내 바깥으로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는 3월 내내 책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개방과 고립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삶을 견디며,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약을 삼키는 날들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