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경 님의 『어른의 어휘력』에서 제가 좋아하는 챕터입니다. 커뮤니케이션, 관계, 사고, 대화, 주장이라는 단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게 만드는 짧은 글입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랑 잘 맞지 않아”, “나랑 달라도 너무 달라”라며 ‘다름’을 이유로 꼽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나의 세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세계를 넓히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거나, 나의 세계를 닫았기 때문에 상대와 나, 그 둘의 여집합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계속 세계를 넓히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점점 내게 익숙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과 안전한 것들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세계는 작아집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때 내 세계가 닫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내 세계가 작아서 이해할 수 없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좀 괜찮아집니다.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오징어는 연체동물이고 연체동물에는 뼈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손을 들었다. "오징어에 뼈가 있는데요?" 선생님은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며 오징어에는 뼈가 없다고 하셨다. 다른 학생들도 오징어를 먹어 봤는데 뼈가 없다고 했다. 나는 졸지에 멍텅구리가 돼버렸다.
분명히 뼈가 있는 오징어를 봤다. 서울로 전학오기 전에 부안에 살던 집, 광의 대들보에 바짝 말린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몸통 가운데 박힌 유선형의 하얗고 단단한 뼈는 소꿉놀이할 때 갈아서 소금이나 설탕으로 풀 반찬에 솔솔 뿌려 모래 밥이랑 상 차렸고 분필처럼 들고 다니며 동네 담벼락에 낙서했다. 오히려 나는 뼈 없는 오징어를 본 적 없었다.
집에 돌아와 한껏 억울한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이르자 이리 일러주셨다. "서울 사람들이 갑오징어를 몰라서 그래. 그리고 다른 오징어에는 뼈가 없어." 세상에! 다른 오징어에는 뼈가 없다니! 내가 맞은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맞은 것도 아니다. 내가 틀린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틀린 것도 아니다.
오징어에 뼈가 없는 게 아니라 뼈 있는 오징어도 있고 뼈 없는 오징어도 있다. 갑오징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징어라면 당연히 뼈가 없는 줄 알아서 뼈 있는 오징어를 실제 본 어린이를 헛것 본 양 대했다. 갑오징어를 아는 나는 오징어라면 당연히 뼈가 있는 줄 알아서 내 말을 헛소리로 듣는 이들을 미워했다.
고등학교 때 지리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걸린 세계 지도에서 사탕수수가 생산되는 국가와 지역을 짚으셨다. 한국에서는 기후상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없다고 하셨다. 멍텅구리가 되고 싶지 않아 손들지 않았다. 단지 속말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사탕수수가 자라는데……"
집으로 돌아와 동생에게 확인했다. "우 리 부안에서 사탕수수 먹었었지, 응?" 동생이 격하게 호응했다. "응! 같이 먹었잖아. 나 기억 나." 그렇다. 우리는 동남아도 남미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사탕수수를 먹었다. 늦여름께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추수 끝난 옥수수 밭 언저리에 사탕수수가 훌쩍 자란 걸 볼 수 있었다.
남의 밭이지만 그 정도 서리야 허락받지 않아도 되었다. 제법 단단한 대를 힘껏 뚝 분질러 이로 껍질을 벗기면 질기고 하얀 속살이 나온다. 껌처럼 잘근잘근 씹어 단물을 빼먹고 찌꺼기를 뱉었다. 단수수였다. 단맛 나는 수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리 교과서에는 사탕수수가 생산되는 지역에 한국이 빠져 있었고 선생님은 한국에서 사탕수수가 자랄 수 없다 단언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시험문제로 '다음 중 뼈가 없는 생물은 무엇인가?'라는 객관식 문제가 출제되고 보기에 오징어가 있었다면 나는 동그라미를 쳤을까, 말았을까. 또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국가가 아닌 곳은 어디인가?'라는 사지선다형 문제가 출제되고 보기에 한국이 있다면 나는 동그라미를 쳤을까, 말았을까.
정답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점수를 올리고 싶은 욕심에 동그라미를 쳤을 것이다. 틀린 답을 맞는 답이라 한 스스로를 멸시했을 것이다. 내 경험을 틀린 답으로 만드는 문제를 기어이 출제하고 만 현실에 슬픔과 좌절을 느끼며 무력감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내 경험을 틀린 답으로 만드는 문제를 기어이 출제하고 만 현실에 슬픔과 좌절을 느끼며 무력감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방구석에 처박혀 종이 나부랭이에다 끼적이기나 했을 거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당신이 못 본 것에 대하여,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 내가 못 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세계 밖에 있는 상대의 언어를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We cannot think what we cannot think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반대말은 주장이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Source: 유선경, 『어른의 어휘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