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영화나 연극의 등장인물이고, 인물이 낯선 도시의 호텔에 도착하는 경험을 주기적으로 필요로 한다면, 배역을 맡은 배우는 아마도 작가나 연출자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기술』
“이 인물은 호텔을 좋아한다고 말하네요.”
“네, 그런 인물이에요.”
“여행도 자주 하겠네요?”
“자주 해요.”
“인물 내면의 어떤 프로그램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인물은 그냥 호텔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도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해요.”
“그건 취향이지 프로그램이 아니잖아요. 프로그램은 인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이잖아요.”
“맞아요. 모르니 말로 내뱉을 수가 없죠. 오직 극중의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서 이런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자기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거에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뭐냐니까요?”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